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슛 라이크 제스!
2002-09-12

조선희의 이창

도대체 그 사이 세상이 몇 바퀴 돈 거야? <슈팅 라이크 베컴>이라는 영국영화에서 인도인 부모는 딸이 축구 못하도록 말리고 다니느라 스토커가 되다시피 했다. 딸은 부모 눈을 속여가면서 축구 하느라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다니는 두 딸의 엄마인 나는 내 딸들이 주인공인 제스처럼 씩씩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교육적 차원에서 가족 단위의 단체관람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영국에 산다는 그 인도인 엄마보다 한 세대쯤 앞질러 있다. <슈팅 라이크 베컴>에서 딸에게 선머슴아처럼 싸돌아다니면 시집 못 간다고 잔소리하는 이 엄마는 나보다는 우리 엄마에 가까운 캐릭터니까 말이다.

나는 지난 여름 5일간을 소금강 계곡의 민박집에서 지냈다. 내 친구 둘과 딸들 다섯까지 모두 여덟명의 여자가 함께 휴가를 갔다. 나는 유소녀 축구팀을 만들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축구공도 준비했다. 컴퓨터에 껌처럼 붙어 있는 아이들을 수시로 떼어내느라 갖은 회유와 공갈협박을 해대는 것이 가정교육의 50% 이상 차지하는 터라, 이번 기회에 아이들에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민박집에 도착해보니 마침 축구를 할 만한 마당도 있었다. 하지만 첫날 저녁에 아이들과 1회전을 치르면서 나는 심히 실망해버렸다. 땅 위에 사각의 라인을 그어놓고 그 안에 축구공과 함께 집어넣어놓으니 내 딸들은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아장거렸다. ‘축구공은 발로 걷어차는 것’이라는 사실이 아직 납득이 잘 안 간다는 태도였다. 답답해진 나는 “힘껏 걷어차보란 말이야” 하고 소리쳤다.

우리 엄마들이 우리에게 축구하는 걸 말린 것이나 우리가 딸들에게 축구하라고 채근하는 것이나 모두 일종의 강박일지 모른다. 그게 엄마 시대의 강박이었다면 이건 우리 시대의 강박인 것이다. 내 딸이 틴에이저가 되어서 어느 날 “엄마, 그건 엄마 취향이야”라고 말한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물론 그게 취향의 문제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축구를 하든 뜨개질을 하든 취향 나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내 딸의 시대가 성역할과 관련한 그 모든 구세대의 통념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전적인 통념의 강물이 워낙 도도해서 잠시 한눈팔다보면 여지없이 쓸려내려가고 마는 시대다, 아직. 제스가 축구공을 차올릴 때 발끝에 차이는 게 단순히 둥근 공만은 아니다. 그건 통념이고 고정관념이다.

친한 여자들 11명으로 구성된 서클이 있는데 월드컵 직후 나는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렸다. “요즘 하루 평균 3∼4시간씩 축구경기를 관전하다보니까, 저 재밌는 축구를 나는 한번도 못 해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어느 금요일 저녁 무렵 한강 둔치 같은 데서 만나서 축구를 해보면 어떨까요? 스스로의 헛발질에 좌절이야 하겠지만.”

하지만 멤버들이 내 충정을 농담으로 오해하는 분위기여서 한두명이 심심풀이로 리플을 달 뿐 대체로 묵묵부답이었다. 40∼50대로 구성된 이 서클에선 내가 청년그룹으로 분류되는 터이니, 노년층의 침묵에는 이런 메시지가 들어 있었을지 모른다. ‘저것이 아직 몸이 좀 쓸 만하다고 으스대고 있네. 그러잖아도 무릎 관절이 덜그럭거리는데 축구공 찬다고 하다가 오른쪽 다리가 같이 빠져서 날아가면 책임질래? 이제 뼈마디가 구멍투성이라 벽모서리에 슬쩍 부딪쳐도 금이 가는데 쟤가 무슨 마음을 먹고 우리를 그런 사지로 끌어들이려는 거지?’

그 무렵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난에 실린 김훈씨의 글은 내게 특별한 감정으로 와닿았다. “…이제 나이 먹고 또 힘이 부쳐서 새벽공을 찰 수가 없다. 억지로 하다가 무릎뼈를 다친 적도 있었다. 다만 글을 쓰면서 공을 그리워할 뿐이다.” 그는 젊은 날의 쌩쌩했던 육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발끝에서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던 축구공을 추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알까. 단 한번도 축구공을 핑핑 날려보지 못하고, 추억할 만한 축구공에 대한 기억조차 없이, 더이상 공을 찰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서글픔을?

딸아.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아직 뼈마디가 구멍 하나없이 단단하게 차 있을 때, 종아리의 힘줄이 바이올린의 현처럼 팽팽하게 울릴 때, 오른발 끄트머리로 한번 힘차게 축구공을 차올려보지 않겠니? 슛 라이크 제스!조선희/ 소설가·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