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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값,그 이상 <THE BEAR>
2002-09-12

anivision

다국어지원과 자막변환이 가능한 DVD 보급으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본어 더빙에 일본어 자막을 지원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많이 출시되고 있지만 일본 문화에 대한 터부인지 아니면 애니메이션에 대한 부정적 시선 때문인지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극장이나 TV에서 공개된 작품이어야 되고 시리즈물의 경우 한글 더빙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출시에 많은 난항을 겪고 있다. 단지 DVD 출시를 위해서 출시 바로 직전에 유선방송에서 방영되는 경우도 있고 방영된 지 오래되어 그 당시 성우가 죽는 바람에 재녹음이 안 돼 중간에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바뀌는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주말 저녁만 되면 영어나 불어 대사에 한국자막이 들어가는 외화를 본 지도 수십년이 지났고 일본어 대사에 한국자막의 일본영화를 보는 것도 이젠 낯설지가 않은데 굳이 일본 애니메이션만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한국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가운데 갑자기 사회자의 내레이션이나 자막으로 몇 회분의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도중에 방영이 중단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러한 작품들의 DVD는 현재의 기준대로라면 방영된 부분까지밖에 출시 못하게 되는 것이고 <황금박쥐>나 <스머프> 같은 작품들도 국내 방영본 테이프를 찾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방영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재더빙하고 다시 방송시간을 잡아야 국내에서 DVD로 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애니메이션은 ‘유치한 것이고 자칫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하찮은 것’라는 인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 올해 안에 국내에서 출시될 예정이다. 비록 비디오 테이프로 출시된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아직까지는 열악하다 할 수 있는 국내 애니메이션소프트 수의 빈약함에 비한다면 희소식임에 틀림이 없다.

아동문학의 영예인 프랜시스 윌리엄스상 수상 등의 경력을 자랑하며 영국의 대표적인 동화작가 중 한 사람인 레이먼드 브릭스의 원작에 기초해 만든 <The Bear>는 27분 정도의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작품이지만 보는 순간 그 시간의 분량이 그리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브릭스의 이전 작품인 <스노우맨>이나 <파더 크리스마스>처럼 <The Bear>에서도 꿈인 듯하면서 현실감이 있게 다가오는 분위기나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선과 색이 자아내는 편안함은 사람들의 창작력과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릴 때 새를 쫓던 중 길을 잃고 헤매다 인간에게 잡혀 동물원에서 자라게 된 ‘북극곰’과 그 곰을 보러갔다 아끼는 테디베어 인형을 우리에 떨어뜨려 상심하는 소녀 ‘틸리’가 만나 한밤중의 런던을 산책하면서 다양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 내용이라고 이 작품은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글만으로는 광경을 상상해보기 힘든 부분이 많다. 한장한장 그려나간 페이퍼애니메이션의 따뜻한 질감과 <스노우맨>에서도 활약한 하워드 브레이크의 음악 그리고 맨 마지막 ‘어디엔가 당신을 위해 빛나는 별이 있어’라는 샬롯 처치의 노래는 이 환상적인 여행이 끝난 뒤 남는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다.

출시 뒤 ‘청소년을 위한 좋은 비디오’ 리스트에 오를 게 분명한 작품이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이러한 작품을 돈주고 사서 보여주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The Bear>와 같은 작품은 비싸서 못 사보고 <스머프>는 국내 방영본이 없어져서 출시가 안 되고 <아키라>는 너무 폭력적이어서 안 된다는 식의 변명이 계속되는 한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시장은 그 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양한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주는 나라만이 문화 콘텐츠 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