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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3부작, 마지막편
2001-04-04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 속의 풍경>

Landscape In The Mist 1988년,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출연 미칼리스 제케

ebs 4월7일(토) 밤 9시

아이들은 기차에 타려고 한다. 그런데 출발부터 보기좋게 실패한다. 막 기차에 오르려는 순간, 벌써 떠나버리고 마니까. <안개 속의

풍경>의 도입부는 이 영화가 철저하게 실패와 불안으로 가득 찬 여행담을 그릴 것임을 시사한다. 독일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아버지를 찾는

알렉산더와 볼라는 세상을 떠돌면서 아케론, 즉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지옥의 모습을 예상대로 지켜보게 된다. “그는 사물을 카메라를 통해

조용히 관찰한다. 정적과 부동의 태도가 그의 영화에 힘을 불어넣는다. 같은 방법으로 감독은 영화의 근원으로의 완벽한 회귀를 달성하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에게 이러한 상찬을 한 바 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작품세계엔 하나의 기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980년대 이전까지 감독은 그리스 서사극과 세계대전 이후 현대사를 접목시키면서 장중한 스타일의 미학을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스 전설을 바탕으로 한 <구세주 알렉산더>가 좋은 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1984) 이후 좀더 개인적인

시각으로 전환해, 심리적 리얼리즘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개 속의 풍경>은 흔히 ‘침묵의 삼부작’으로 칭해지는 영화들, 즉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 <양봉업자> 그리고 <안개 속의 풍경> 중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하는 작품이다.

<안개 속의 풍경>은 한편의 모호하기 그지없는 텍스트다. 이 영화는 여러 시각에서 읽어도 나름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스 현대사에 대한

암시로는 영화에서 “독일”이라는 단어가 핵심 키워드이자 일련의 주술적인 힘을 갖는 것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는 아이들의

여정은 순례자의 고행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엄숙함마저 느끼도록 한다. 신화에 뿌리를 둔 설정도 곳곳에 박혀 있다. 영화에서 오레스테스라는

인물은 볼라 일행에게 유일하게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 등장하는데 같은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페데리코

펠리니, 그리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에게 바치는 것이 분명한 오마주까지 영화에 가세하면서 안개처럼 모호한 시정(詩情)을 담은 이 작품은

신비로움을 더한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곳은 의외로 일본이다. 감독이 미조구치 겐지 감독에게서 길게 찍기의 미학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뿐만 아니라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의 불가능성, 즉 화면 내에 담을 수 있는 피사체와 시공간적인 한계를 인식하는

감독으로 앙겔로풀로스를 평가하면서 “일본영화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 근본적으로 같은 태도를 지닌” 연출자로 지목한 바 있다. <안개

속의 풍경>에서도 카메라를 느리게 팬하는 기법이나 인물의 감정선을 살리면서 길게찍기를 선호하는 감독의 스타일은 여전하다. 소녀 볼라가 기차를

타기 위해 한 군인에게 매춘을 시도하는 장면은 처연하다. 볼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같은 화면 속 군인은 도덕과 쾌락 사이에서

마냥 주저한다. 그리고는 마지막 순간에 돈을 내던지고는 사라진다. 이렇듯 철저하게 배우들 연기에 의존하면서 영화를 마지막 ‘한계선’까지

밀어붙이는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고전적 미덕을 극히 중시하는, 영상의 고고학자처럼 보인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