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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캐릭터 대결구도의 드라마 <라이벌> <내사랑 팥쥐>
2002-09-13

캔디랑 이라이자,또야?

일본이나 영국 등을 처음 찾아갔을 때 가장 먼저 혼란을 느끼는 것이 교통체제이다. 우리가 ‘사람은 좌측통행, 자동차는 우측통행’인 데 반해 이 나라들은 ‘자동차가 좌측통행, 사람이 우측통행’이다. ‘뭐, 그게 큰 문제일까’ 싶지만, 자동차 진행방향은 물론이고 자동차 핸들의 위치에서 지하철 계단의 통행방향, 심지어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에서 급한 사람을 위해 비워줘야 하는 방향도 우리와 반대이다. 초보 여행자의 경우에는 버스 정류장의 노선을 거꾸로 보거나 에스컬레이터에서 괜히 다른 사람들의 길을 막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단순히 진행방향이 바뀐 것뿐이지만, 몸에 밴 사회적 습관과 관행이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에게도 일정한 관행과 관습이 있다. 주인공의 모습은 대게 이러이러해야 하고, 조연이나 악역은 또 이러이러하다는 암묵적인 동의와 기대이다. TV를 오랫동안 본 경험이 축적되면서 형성된 이 관행은 드라마를 제작하는 입장에선 일종의 ‘체크리스트’로 작용한다. 사람들의 기대치와 금기를 미리 알고 제작할 경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물론 이런 관행을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따라가면 ‘상투적’이란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주말에 방송되는 SBS 특별기획 드라마 <라이벌>과 MBC 월화 미니시리즈 <내사랑 팥쥐>는 이 관습이란 면에서 눈길을 모으는 드라마이다. 기본적인 인물구도는 두 드라마가 닮은꼴이다. 여자주인공은 능력과 기회를 가진 이와 상대적으로 모든 조건에서 열악한 사람으로 양분되어 있다. 남자주인공 역시 물질적 여유와 지적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여러 드라마에서 숱하게 보아온 정형화된 구성이다.

그런데 <라이벌>이 ‘가진 자는 악인(惡人), 없는 자는 선인(善人)’이라는 전통적인 관행에 충실한 것과 달리 <내사랑 팥쥐>는 그 반대방향을 추구했다. 드라마의 타이틀롤이라 할 수 있는 장나라는 극 설정상 고집스럽고 이기적이며 필요에 따라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네거티브’한 성격이다. 기존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덕목으로 꼽혀온 것들은 외형상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제작진은 “착하고 너그럽고 인내가 강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남의 손가락질을 받아서 안 된다”는 전통적인 드라마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한 일종의 반란을 ‘음모’했다. 제작진은 이런 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드라마 제목에도 ‘콩쥐’가 아닌 ‘팥쥐’를 넣었다. 만약 이러한 시도가 성공했다면 패스트푸드점의 음식처럼 규격화되는 드라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을 것이다.

‘만약’이란 표현에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아쉽게도 <내사랑 팥쥐>의 시도는 현재까지는 단순히 기획서에서만 시도된 ‘종이 위의 반란’에 그치고 있다. 4회가 방송된 현재까지 드라마에서 장나라의 모습은 제목과 달리 전혀 ‘팥쥐’스럽지 못하다. 고집스럽기보다는 자기의 가치관이 뚜렷한 것이고, 이기적이라기보다 삶에 솔직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도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능란한 처세술을 부리지 않는 담백한 성격 때문에 얻는 오해로 나타난다. 이런 모습이라면 악녀라기보다는 장나라가 SBS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보여준 양순이의 모습에 약간 변화를 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장나라의 모습이 이렇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상대역인 홍은희의 모습도 자연 어정쩡하다. 착하고 흠잡을 데 없는 ‘콩쥐’형이 아니라, 겉으로 봐도 사람들이 미워할 만한 전형적인 악인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드라마의 배경이 화려한 퍼레이드가 열리는 놀이공원이라는 점이 새로울 뿐, 이런 모습들은 기존 드라마와 별로 차별화될 것이 없다.

그렇다고 <라이벌>의 설정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거나 설득력을 갖는 것도 아니다. 김민정의 모습은 지금까지 봤던 수많은 드라마의 악녀들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게 없고, 소유진 역시 강인한 의지와 끈기를 갖고 있는데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삶에 긍정적이다. 이 역시 ‘이라이자-캔디’라는 우리 트렌디드라마의 대립구조를 따르고 있다.

솔직히 나는 궁금하다. 당초 기획단계에서 신선하다는 반응과 함께 ‘지나친 파격이 아니냐’는 일부 우려를 낳았을 정도로 패기를 보였던 <내사랑 팥쥐>가 막상 방송에서는 왜 기존 관행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좌측통행’에 익숙한 시청자들 앞에서 역주행의 두려움이 컸던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우측통행’을 할 생각이 없었는지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라이벌>과 <내사랑 팥쥐>는 방송사는 다르지만 같은 외주 프로덕션에서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프로덕션에서 동시에 비슷한 내용의 드라마를 두 방송사에 납품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를 천연덕스럽게 같은 시기에 방송하는 방송사의 느굿한 배포도 놀랍다. 뭐, 이것이 한국방송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할말은 없다.김재범/ <스포츠투데이> 기자 oldfield@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