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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몸부림칠 때>(가제)의 이수인(1)
2002-09-14

쿨한 농촌,쿨한 유머

● 사람의 삶을 '의지'와 '우연' 가운데 한 변수로만 말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의지를 독립변수로 놓았을 때 설명하기 쉬운 이가 있고, 반대로 우연을 앞세울 때 더 잘 묘사되는 이가 있다. 이수인(41)은 후자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선택했다"는 능동태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수동형의 서술이 더 어울린다. 삶의 선택사항들을 적극적으로 넓혀가는 스타일이라기보다, 그게 저절로 줄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그의 인상도 느긋하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사람이 세계관이나 작품관까지 느긋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논리 연산이다. 이씨의 리얼리즘관은 지금 우리 문화에서 구체적이고 날이 서 있다.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모순과 역동 그 자체가 삶인데 그걸 잡아내는 게 리얼리즘이지, 없는 얘길 그럴듯하게 만드는 게 리얼리즘이 아니다."

영화감독 이 수 인

연극만 10여편 연출해온 이씨는 지난 3월부터 영화감독 데뷔작업에 나섰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제작했던 마술피리의 오기민 대표가 그를 끌어들였다. 이씨는 오 대표와 80년대 중반 문화운동단체에서 만나, 그뒤로도 가깝게 지내온 친구 사이다. 영화마니아는 아니더라도 웬만큼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말하길 좋아했던 이씨지만, 오 대표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감독 데뷔는 부지하세월이었을지 모른다.

오 대표는 <VJ특공대>에서 한 시골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원동기 면허를 따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담은 프로를 봤다. 마을 사람들은 왜 굳이 면허를 따야 하냐고 묻고, 시험칠 때 경찰들은 표 안 나게 가르쳐주고 하는 그 광경이 낯설었지만, 거기에 무궁무진한 유머가 있을 것 같았다. 이 분위기를 살리면서 거기에 로맨스를 넣자는 생각을 가지고 이씨를 찾았다. <농활 프로젝트>라는 가제로 시나리오 작업이 시작된 게 지난 3월이다.

이씨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세 시골 토박이 할아버지와, 최근 이 마을로 돌아온 할머니의 4각 로맨스라는 틀이 짜여졌다. 원래 모티브가 됐던 원동기 면허시험은 세 할아버지 중 한명이 겪는 에피소드로 삽입됐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영화의 관건은 중심이 되는 러브 스토리보다, 디테일과 에피소드, 그리고 그걸 꿰는 유머의 독특한 문법이 될 것 같다. 이씨의 말. "본인들은 전혀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는 말들이 관객이 들을 땐 웃기고, 도시 사람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소소한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별 내용도 없으면서 웃기는 것이랄까."

제목이 최근에 <고독이 몸부림칠 때>로 바뀌었다. 코미디라는데, 좀 뜬금없다. 제목에 대한 이씨의 설명은 영화를 예상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고독'이나 '몸부림친다'는 표현 모두 얼마나 처절해. 그런데 그 둘을 붙여놓으면 얼마나 웃긴가. 유치하고. 고독이 몸부림친다니. 그게 노래와 함께 붙으면 의미를 가지고 살아나거든. 일종의 패러독스인데." 그가 연출한 연극 중에는 형식과 내용을 일부러 어긋나게 하거나, 소설의 자동기술법을 차용한 실험극이 적지 않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의도하는 게 자신이 연출했던 <대머리 여가수>와 비슷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공허함과 포복절도할 웃음을 동시에 주는 것. 삶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고. 모순과 역동 그 자체."

이씨는 장르에 충실한 영화도 좋아하지만, 굳이 취향을 밝히면 열려 있고 공허한 느낌을 주는 게 좋다고 말했다. 홍상수 영화 같으면 '설렁설렁한' <생활의 발견>이 제일 좋다고 했다. 소설 같으면 하일지가 좋고. 그렇다면 앞에 인용한 이씨의 리얼리즘관까지 곁들일 때, 의문이 생긴다. '노인'이나 '시골'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의 고정된 이미지가 커서 아이러니를 곁들이기가 쉽지 않다. <집으로…>나 <죽어도 좋아>는 완성도와 관계없이, 열린 영화로 보기는 힘들다.

<고독이 몸부림칠 때>(가제)는 어떤 영화?

해안가의 한 시골마을. 60대 중반의 세 토박이 할아버지가 '삼총사'처럼 붙어다닌다. 이필국 할아버지는 조그만 멸치어장을 갖고 있다. 소심하면서 인텔리 같은 모습이 셋 중 가장 시골사람 같지 않다. 홍순경 할아버지는 농사지으면서 조그만 가게를 차렸다. 조그만 오토바이로 나름대로 스피드를 즐기는 스피드광인 그는 갑자기 면허시험을 따라는 경찰의 지시로 애를 먹는다. 소규모 타조 농장을 운영하는 배중달 할아버지는 마초 같은 허풍쟁이다. 그런데 이 마을 유지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 함께 자랐다가 도시로 떠난 송인주 할머니가 어느 날 혼자 돌아온다. 소박맞았다, 남편이 도망갔다, 소문이 무성하게 퍼진다. 세 할아버지가 이 할머니와 사귀려고 경쟁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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