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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 크랭크인 준비 중인 박광정(2)
2002-09-14

우연처럼 연극을,숙명처럼 영화를

연극연출가 박 광 정

나이 30살 때인 92년, 대학원생이던 그는 자신의 첫 연출작 <마술가게>를 상연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후 <저 별이 위험하다> <비언소> <모스키토> <매직타임> <날 보러 와요> 등을 연출하면서 그는 농짙은 풍자가 담긴 코미디의 달인으로 손꼽혀왔다. 그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날선 웃음으로 조롱했고, 사회의 환부를 송곳으로 찍어냈다. 이러한 연출가로서의 이미지는, 영화 출연작이나 드라마에서 보여준 코믹한 연기와 겹쳐지면서 '박광정=코미디'라는 당연한 듯 보이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박광정 자신은 "나는 진지한 쪽"이라고 설명한다. 그동안의 연극을 보며 관객이 웃긴 했지만, "이야기 자체는 하드한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거운 내용이라도 밝게 만들어 제대로 전달하려 했다는 점이 그런 인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난해 연출한 강신일의 모노드라마 <진술>은 박광정의 다른 면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의 첫 영화 연출작이 된 것도 박광정의 '진정한 모습'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현재 그는 자신의 극단인 파크극단의 두 번째 작품 <체크메이트>을 정보소극장에 올려놓고 있다. 그가 올해 초 오디션을 통해 신인배우 15명을 뽑아 극단을 꾸린 것은 연극배우들이 영화쪽으로 많이 빠져나가 연극 캐스팅이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꿈꾸는 연극과 영화의 다리를 놓는 작업을 하자면, 신선한 발상의 인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충무로에 비해 대학로는 상당히 뒤처졌다'는 일반의 통념은 뒤집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러나지 않아 그렇지, 소재나 주제는 대학로가 훨씬 발빠르게 취한다는 것. 대학로의 생동감이 충무로에 결합되면 참신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파크극단은 두 '길'을 연결하려는 박광정의 전진기지인 셈이다.

영화감독 박 광 정

영화를 만든다고 선언한 이후 그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는 "왜 하필이면 하일지 소설 중 영화화하기 가장 어려운 작품을 붙들고 있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한 남자의 독백만으로만 이뤄진 하일지의 원작을 무대가 아닌 영화로 옮기기엔 까다로울 것이라는 지적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왜 네가 잘하는 풍자 코미디 대신 심각한 이야기로 데뷔하려는 거냐"는 애정담긴 충고가 녹아들어가 있다.

박광정 또한 이런 점을 의식하지 않는 건 아니다. 사실, 그의 영화 데뷔작은 <진술>이 아닐 수도 있었다. 99년엔 기획시대에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코미디를 만들 참이었으나 <이재수의 난>이 흥행에 실패해 짐을 싸야 했으며, 유니코리아에선 <새들은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는다>를 디지털영화로 만들려고 했지만, 이를 주선했던 문성근이 영진위 부위원장으로 가면서 무산됐다. 박광정이 <진술>을 첫 영화로 만들려는 이유는 그 안에 있던 뭔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동시대성, 이런 것을 주로 고민해왔지만, 연극을 위해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부터는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정리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가 인터뷰 뒤 이례적으로 보낸 이메일을 보면 이 작품에 대한 솔직한 심경이 드러난다. "다시 <진술>을 정리하자면 한 남자의 지독한 사랑이야기지요. 80년대를 거쳐온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예요. 아니 저랑 비슷한 또래의 이야기지요. '그것이 지금 유효할 수 있을까?'에 대한, 아니 '우리는 너무 과거를 일찍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것에 대한… 얘기로 보여지면 좋겠습니다."

<진술>을 영화로 만든다는 결정은 연극을 준비하던 지난해 4월 무렵 내려졌다. 의욕이 넘쳐서였는지, 시나리오 초고도 연극이 발표되던 무렵인 6월 마무리됐다. 제작사도 <아이언 팜>을 만든 씨네와이즈로 진작 결정됐지만, 그는 두 가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선 시나리오. 초고에서 장정일의 각색을 거쳐, 영화사 기획실의 손길과 자신의 마무리를 통해 무려 13개의 버전을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높은 벽이 있으니, 주인공 역할을 맡을 배우가 그것. 나이는 30대 후반 또는 40대며,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야 하고, 연기력이 탄탄해야 하니, 한국영화계 현실을 고려하면서 꼽아보면 손가락 다섯개가 민망할 정도다. 그는 배우가 결정되는 대로 시나리오를 마무리짓고, 영화의 40%에 해당되는 해외 촬영지를 헌팅한 뒤 크랭크인할 계획이다. 자 그럼, 초보 영화감독 박광정의 소감은? "연극은 10편쯤 연출했다. 그래서 나 스스론 <진술>을 내 첫 번째 영화라기보단 11번째 연출작쯤으로 생각기로 했다. 그래야 '첫'이란 말에 걸린 부담감을 덜지 않겠나."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진술>은 어떤 영화?

주인공인 '나'는 40대의 국립대학 철학교수다. 10여년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18살의 소녀와 결혼했던 그는 신혼여행 10주년을 기념해 다시 그곳을 찾는다. 여관에서 자고 있던 그는 형사들에 의해 다짜고짜 경찰서로 끌려간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손위 처남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이미 8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정신과 의사인 처남을 살해한 뒤 여행지로 도피했다는 경찰의 주장에 그는 격분한다. 그는 차분히 자신의 알리바이를 주장하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는 특히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극구 설명한다. 그리고 나이어린 아내가 유학생활 동안 얼마나 심한 고생을 했는지, 타지에서의 빈곤한 생활 중에도 부인과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사랑을 나눴는지를 얘기한다. 하지만 경찰에 따르면, 그는 전 부인이 이혼해주지 않아 제자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것이고, 아내의 죽음을 부정하는 정신병 환자일 뿐이다. 점차 현실과 환상은 뒤섞이고, 그가 체온으로까지 간직하고 있는 애절한 사랑은 그의 머릿속 상상인지, '현실적 현실'인지 갈수록 애매모호해진다. 그의 '진술'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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