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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문화적 편견에 슛을 날리는 <슈팅 라이크 베컴>(1)
2002-09-24

˝아니오!˝라고 말해요

오호 이런! 영국에 사는 인도계 소녀가 축구공 차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고? 흐음…. 영화를 분석적으로 보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쯤해서 이미 <슈팅 라이크 베컴>의 플롯을 만들어내는 갈등의 축들이 머리 속에 착착 들어서기 시작할 것이다.

이 영화의 컨셉은 딱 한줄로 요약할 수 있지만 그 안에 이미 3가지의 주요 갈등 축이 설정되어 있고, 영화를 보고 나면 부수적인 이슈만 해도 서너 가지는 더 발견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로부터 잠시 실례하자면 <슈팅 라이크 베컴>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갈등의 백과사전’이다.

대개의 경우 한편의 영화 안에 복잡한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것은 금기 사항이다. 종합선물세트 안에 들어 있는 과자가 종류는 다양해도 딱히 먹을 게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만약 그 과자들이 알록달록한 껍질에 싸여 코믹하게 누워 있다면? 게다가 알맹이 역시 과자계의 흥행 상품과 문제 상품을 나름의 규칙에 따라 배치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몇 박스를 사서 주위 사람들에게 추석 선물로 나눠주겠다. 그리고 이 종합선물세트의 어리숙한 진정성, 상쾌한 유치함에 대해 함께 수다를 떨겠다.

문화적 거미줄에 묶인 소녀

이제 <슈팅 라이크 베컴>의 주인공 소녀 제스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거미줄을 둘러보기로 하자. 우선 이 영화는 세상의 모든 십대가 직면하게 될 세대간의 갈등에 기반을 둔 성장영화다. 제스가 사는 곳이 어디든, 그의 피부가 노랗거나 까맣거나 하얗더라도, 그가 축구를 하고 싶어 하든 남극 대륙을 탐험하고 싶어하든, 장담컨대 그의 부모는 한숨 쉬고 염려하며 잔소리를 할 것이다. 세상은 늘 변화하고 자식이란 그 변화의 앞 파도에 몸을 싣게 마련이니까. 제스와 그의 친구 줄스 역시 앞 파도에 몸을 실은 채, 뒤에서 구명보트를 타고 노를 젓는 부모에게 ‘난 즐거워요. 그러니 안심하세요!’라고 소리지르는 전형적인 십대다.

그런데 상황을 구체적으로 규정짓는 것은 제스가 영국에 사는 인도계 집안의 딸이면서 축구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십대 소녀 제스의 방에 앵글로 색슨족 남성 축구선수인 베컴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는 장면은 일상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이 메타포는 단번에 민족, 인종, 성차(gender)의 문제를 부각시킨다.

인도가 영국의 대표적인 식민지였고 독립하기 위해 오래도록 투쟁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제스네 가족은 식민 본국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피식민지 출신이고, 이들 가족과 토박이 영국인들 사이에 놓여 있는 감정의 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런 경우 이주민들은 개인과 집단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문화적 정체성을 고수하게 된다. 이는 정치적으로 온당한 일이기도 하다. 화려한 사리로 온몸을 치렁치렁 감은 제스네 친척이나 민족적 스승의 사진을 거실에 걸어두고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고 명상하는 가족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섣불리 평가할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제스는 인도 사람인 동시에 영국에 사는 소녀다. 어디서나 소녀는 대중문화의 스타를 자신의 우상으로 숭배하게 마련이고, 지금 영국은 베컴이라는 축구선수가 온 나라를 사로잡고 있다. 과연 제스가 베컴을 좋아하기 전에 자신의 피부색깔이 베컴과 같은 백색인지를 따져보아야만 할까? 이런 식으로 형성된 타 인종에 대한 친화력이 현실 속의 백인 청년 조에게로 쉽사리 번져서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고 키스하고 싶어지는 것을 갈색 피부의 제스는 억눌러야만 할까?

문제는 한 가지 더 있다. 제스는 축구장 관중석에서 유니온 잭으로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베컴의 이름이 새겨진 플래카드를 흔드는 쪽이 아니라 아예 베컴처럼 공을 차고 싶어하는 축이다. 게다가 우연하게도 재능까지 갖췄다. 축구를 좋아하며 재능을 갖췄을지라도 그가 소년이 아닌 소녀라면 축구공과 축구화를 집어던지고 부엌에 들어가서 차파티를 요리해야 하는가? 그래서 스무살이 되면 부모 세대의 눈에 익숙한 직업을 얻을 수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스물다섯이 되면 같은 민족 안에서 배우자를 찾아나서고 시부모의 눈에 들기 위해 사리를 걸쳐야 하는가? 거린다 차다 감독은 대중문화 중에서도 흔히 남성적인 관심사로 분류되는 스포츠, 그것도 여성의 개입이 거의 봉쇄되어 있는 가장 마초적인 스포츠인 축구를 끌어들임으로써 성차를 둘러싼 고정관념을 더욱 자극적으로 건드린다.

제스와 감독, 관객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한목소리로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남은 문제는 우리의 주인공 제스가 자신의 선택과 가족의 전통주의 사이에서 가급적 지혜롭게 일들을 엮어내는 것뿐이다. 감독은 골문을 향해 신묘하게 휘어지는 베컴의 킥을 소녀들의 운명에 비유했다. 가고 싶은 곳이 정해져 있더라도 일직선으로 달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해야 하는 서글픔과 함께, 그러다보면 특이한 기술과 성숙함으로 인생의 목표에 골인할 수도 있는 어린 여성의 삶의 여정을 아울러 지칭한 것이리라.

제스의 엄마, 줄스의 엄마는 다르다?

그외에도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은 문제적이고 흥미로운 코드들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그중 하나는 인도인 가정과 영국인 가정이 지닌 서로 다른 강박관념을 대조하는 것이다.

제스네 엄마와 언니에게 배경 좋은 집안의 남자를 고르는 것이야말로 의심할 여지없는 인생의 목표다. 정숙하고 우아한 엄마와 섹시하고 앙큼한 언니의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관에 관한 한 둘은 일치한다. 제스의 아빠는 젊은 시절에 유능한 크리켓 선수였으나 백인들의 경멸적인 태도 때문에 포기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인도인 가정은 결혼 강박증에 사로잡힌 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딸에게 자신의 인생 교훈을 전수하고 싶은 억압적인 분위기로 돌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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