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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준의 세계영화제 방문기 [1]
2002-10-04

유바리 술집 골목,눈발은 소리없이 날리고‥‥

(이 글을 읽으시기 전에 일단 앞에 실린 김소희님의 글을 읽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글을 건너뛰신 분들은 이 글도 건너뛰시리라 예상합니다만.)

당신이 영화에 순정을 바친 영화제 열혈 관객의 한분이시라면, 아마도 영화제가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에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저처럼, 영화제 내부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일과 마찬가지로, 영화제를 치르는 일 또한 끊임없이 진정성을 위협하는 이런저런 ‘세속’의 힘들과 부딪쳐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진정성 순도 100%의 영화제가 존재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계산과 타협만으로 이루어진 영화제 또한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영화제를 지탱하는 힘은 관객으로부터 나오고, 관객이 영화제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영화의 진정성과 만나는 것, 그럼으로써 영화에 바친 그들의 순정이 헛된 꿈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니까요.

이 글은 그러한 관객인 당신에게 드리는 작은 영화제 가이드북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영화제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물망’ 속에서 영화의 진정성을 지켜나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여행길에, 마침 이 영화제들이 열리는 때에 근처를 지나게 되면, 잠시 들러서 영화제의 분위기를 맛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만든 영화가 이 영화제 중의 하나에 초청을 받는다면, 될 수 있으면 참가하십시오. 여기서 잠깐, 궁금하실 테니, 선정기준을 밝혀야겠군요. 첫째, 제가 직접 다녀보고 체험한 영화제들만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둘째, 그리고 제가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영화제들을 골랐습니다. 셋째, 비슷한 성격과 유형의 영화제가 겹치지 않도록, 영화제들의 다양한 ‘표정’과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도록 골고루 안배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리스트임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행 가이드북 문체를 참조했고, 영화제 소개 앞부분에는 공식 명칭, 2002년의 개최 기간, 장소, 그리고 더 자세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공식 홈페이지 주소를 덧붙입니다.

선댄스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

1월10∼20일.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 www.sundance.org

로버트 레드퍼드 등이 미국 독립영화의 ‘발전’을 위해 만든 선댄스연구소(Sundance Institute)가, 독립영화를 ‘진흥’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범시킨 영화제. 독립 영화인들 몇명이 모여 신세한탄(!)을 나누던 초창기의 모습은 이제 전설이 되었고, 차세대 주자를 탐색하러 온 할리우드 에이전트에서 미국 틈새시장 진출을 노리는 유럽 아트필름 프로듀서까지 온갖 ‘업자’들로 북적임. 평범한 관객은 메뉴의 풍성함에 비해서 서비스는 형편없는 식당에 온 듯한 느낌을 받기 딱 좋음. 미국 독립영화의 한해를 결산하고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는 축제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독립영화의 상업적 성공 때문에 영화제가 비즈니스의 판이 되었다는 불평 또한 계속되고 있음.

풍경: 파크시티는 스키 리조트에 딸린 조용한 마을. 눈 덮인 벌판을 달리는 조그마한 셔틀버스에는, 부티나는 스키복을 입은 관광객들과 꾀죄죄한(?) 차림의 영화제 관객이 사이좋게 함께 타고 있음.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Yubari International Adventure Fantastic Film Festival)

2월14∼18일. 일본 홋카이도 유바리시

상영작 수도 많지 않고, 호사스런 파티도 없지만, 한번 와본 게스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으로 기억되는 작고 아름다운 영화제. 한때는 탄광촌으로 번창했고, 탄광이 문을 닫은 지금은 멜론 농사, 스키장과 영화제로 특징지워지는 소읍이 유바리임. 영화제 기간 중에는 일본 각지에서 순례자처럼 찾아온, 수는 작으나 열렬한 ‘영화제’ 팬들과 은퇴한 노인들이 대부분인 마을 사람들이 가족처럼 어울리는 따뜻한 분위기가 만들어짐. 일본 경제의 불황 탓에 최근에는 재정난으로 존폐의 기로에 놓여 있다는 우울한 소식. 그래도 영화제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은 변함이 없다니, 아마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듯.

풍경: <밀레니엄 맘보>의 마지막 장면을 유바리에서 찍은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완성된 영화를 가지고 돌아와 선보인 날 밤. 호텔 뒤편의 시골스런 술집 골목을 가방을 둘러메고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 눈발은 소리없이 날리고….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Brussels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

3월15∼30일. 벨기에 브뤼셀. www.bifff.org

메인 극장에서는 보름 동안 SF, 호러, 스릴러, 판타지영화의 마라톤이 숨쉴 틈 없이 이어지고, 영화제 기간 내내 사나흘 일정으로 게스트들이 계속 왔다가 떠나가는 지구력 좋은 영화제. 1997년, 처음 이 영화제를 찾았을 때 받았던 문화충격을 잊을 수 없음. 관객의 박수와 환호와 야유 속에 진행된 심야 상영, 보디 페인팅 콘테스트, 가면 무도회와 레이브 파티를 뒤섞은 ‘뱀파이어의 무도회’ 등. 게스트와 관객과의 거리가 없는 편안한 영화제이면서, 주류 문화에서 소외(?)된 듯한 관객의 모습 또한 이방인에게는 구경거리였음. 내게는 폴 버호벤, 피터 잭슨, 가스파 노에 감독과의 저녁 식사로 기억되는 영화제이기도 함.

풍경: 상영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벨기에 왕립박물관에 가면 보시, 브뤼겔, 마그리트의 그림을 만날 수 있음. 그 그림들을 보다보면, 이 도시의 판타스틱영화제가 매우 크고 오래된 전통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옴.

관련인물

김홍준/ 영화감독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