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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엄마
2002-10-10

충무로 다이어리

어제가 새로 제작한 영화의 개봉일이어서,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부산한’ 하루를 보냈고, 언제나처럼 있는 개봉 축하 모임에 갔다가 새벽 2시쯤에 귀가했다. 늦게 귀가할 때면, 하나뿐인 딸아이는 으레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게 마련이다. 비몽사몽 늦잠을 자고 있는 사이, 이미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주신 엄마가 전화를 걸어 “오늘 누구 생일잔치 한다는데, 우리 애만 선물 준비 안 했더구나, 어쩐 일이냐”고 물으신다. 참, 그렇지. 오늘 같은 반 친구가 생일잔치 한다고 초대했었지. 뒤늦게 다른 아이 집에 전화를 걸어 우리 아이도 잔치가 열리는 음식점에 같이 데려가주길 부탁한다.

부랴부랴 집을 나와, 사무실에 들러 개봉일 흥행성적을 체크하고,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반응을 살펴보고, 직원들과 간단한 회의를 하고는 빠뜨린 선물을 급히 사서 잔치 장소인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한다. 얼마 전엔 아이의 졸업앨범 촬영날짜를 깜박 잊어, 친정 엄마의 걱정을 들어야 했다. 아이를 챙기고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와 급히 사무실로 돌아오면, 이제 유치원생 엄마에서 영화인으로 돌아와 책상을 지킨다. 개봉 극장 앞 카페에서, 시네2000의 이춘연 대표는 제작사가 두개였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했다. 제작업무만 하는 영화사, 개봉업무만 하는 영화사. 그만큼 개봉 준비와 흥행 결과들이 괴로운 일이라며….

그렇다. 개봉 때가 되면, 스트레스 수치는 급격히 올라가고 불안, 초조, 긴장감이 몸과 마음을 죄어온다. 수십편을 제작한 제작자라도, 영화란 것은 매번 경우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매 영화 때마다 ‘예측불허’의 상황에 놓이게 마련이다. 그 일만 매달려도 능력이 모자라 미쳐버릴 판인데, 아이를 제대로 기르는 의무와 숙제가 또 한편에 있으니 이맘때쯤 되면 한쪽에선 엄마로서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면서,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영화계를 둘러보면, 유독 결혼 안 한 노처녀들이 득시글댄다. 기혼자라 하더라도 늦도록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혼자 중엔 영화일을 같이 하는 커플이 많다는 것도 특징 중 하나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밤 새워 남녀가 함께 부대끼며 고단한 일을 해대는 여성 영화인들을 편하게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인가. 나 역시, 언제나 일과 아이에 대한 양육을 둘 다 잘해보려고 발버둥친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영화일이 우선식으로 하루하루가 돌아간다. 이를테면, 일이 덜 바쁠 때 몰아서 책을 사준다거나, 놀아준다거나 하다가 영화일이 정신없이 돌아갈 땐, 며칠을 친정 엄마에게 맡겨두는 식이다.

얼마 전에 본 <로드 투 퍼디션>에서 유일하게 인상적이었던 대사 한마디, “자식은 평생 부모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는. 우리 아이가 봤다면, 거꾸로 “내 부모는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에서는 한국 영화계의 여성인력의 진출 현황 및 실태 조사를 위한 설문 작업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연말쯤에 하는 여성영화인 축제행사 기간 중에 ‘포럼’ 형식으로 발표되고, 논의될 예정이다. 결혼 전과 후의 직업에 대한 전망이나 개인의 변화 등에 대해 알아보는 항목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결과가 나 역시 몹시 궁금하다. 영화일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영화일의 특수성 때문에 기혼여성, 특히 자녀를 둔 여성영화인의 이중의 힘듦은 더하다고, 지금 나는 도대체 지극히 사적인 넋두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일하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 사회가 같이 고민해야 한다는 식의 문제제기를 하는 것인가. 결국 얼빠진 글이 되고 말았다. 원고 마감시간을 한참이나 넘기고 앉아서 말이다. 두루 죄송하다.심재명/ 명필름 대표 shim@myungfil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