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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컬트 <플레이어>
2002-10-23

주머니를 여는 선수,마음을 여는 선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풍경 때문에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어떤 산골에 마을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입소문이 퍼지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되면서 땅값이 오르고, 자본이 투입되어 마구잡이 개발로 대규모 리조트가 형성되고 깔끔한 도로와 위락시설들이 들어차게 될 것이다. 풋풋한 인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농부들은 집을 팔고 어디론가 떠나버렸거나 영악한 장삿꾼으로 변하게 되리라. 오직 관광객의 호주머니만을 털어내도록 개발된 그곳에서 사람들은 점점 환멸을 느끼고 ‘여기도 변했어’라는 말만 남기고는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설정은 가정이랄 것도 없다.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더이상 이런 일이 생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났었으니까.

문화예술이란 것도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찾아보는 여행지 같은 것이라고 비유해 보면, 그 운명도 관광단지가 되어 번영을 누리다가 결국엔 파괴되고 버림받는 산골마을과 닮은 과정이 있다. 처음에는 무목적의 거칠고 순수한 몸부림에서 시작된 어떤 창작의 행위들이 그 순수한 감동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본가가 꼬여들게 마련이다. 자본을 투자하고 규모를 키운다. 하지만, 자본가와 결탁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자본가의 것이 되고 만다. 왜냐고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가 왕이고 천재고 전문가고 권력이고 표준이고 지침이고 모범답안이다. 자본을 잘 모으고 많이 불리는 사람만이 최고의 발언권을 가진다. 왜냐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그러나 자본이 투입되고 자본을 관리하는 전문가가 개입되는 순간부터 창작의 주체는 예술가가 아니라 그들, 이른바 기획자라고 불리는 자본관리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돈을 버는 대가로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

이를테면 음악에서 돈냄새가 나면 이들은 즉각 달려가 ‘기획’에 착수한다. 작곡자를 사서 음악을 ‘주문제작’ 하고 어디선가 가수를 구해 온다. 필요하면 그룹도 결성시키고 구관조를 조련하듯 가수를 키운다. 모든 것은 구매욕을 자극하기 위한 기획이고 설정이다. 그 결과물과 행위들이 모두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지만 나중엔 그것이 음악이 아니었음을 알고는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런 이유로 요즘 음반 업계는 사랑받는 가수도, 존중받는 장르도 없이 늙은 창녀처럼 쫄딱 망해가는 중이다. 영화계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대체할 경쟁 장르가 없기 때문일 뿐이다. 영화는 이미 철저히 흥행을 목표로 기획된 위락시설일 뿐 예술작품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많은 기획자들이 개입되어 있고 예술가들의 발언권은 너무나 초라하다. 주문제작되는 시나리오와 고용된 감독. 그리고 제작 조건으로 제시되는 캐스팅. 흥행예감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되는 작품의 방향. 그렇게 흥행 전문가들에 의해서 철저히 제작되는 구조 덕분에 우리는 너무나 재미있는 영화들을 끊임없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우리는 가장 천박한 문화예술 장르로 영화를 꼽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현재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가요 프로그램이 가장 천박한 지경이 된 것을 목도하듯이 말이다.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선수는 기획자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선수는 예술가들이다. 사람들이 처음 어떤 문화에 대해 주머니를 열었던 이유는 그것이 먼저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란 것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현재의 그 어떤 흥행대작도 그 원인은 대규모 제작비와 슈퍼스타를 동반한 탁월한 기획이 아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엿보이는 어떤 순수한 예술성 때문이라는 소박한 진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자본가들이여, 기획자들이여, 오래오래 잘살고 싶으면 예술가를 끝까지 존중하라.김형태/ 화가, 황신혜밴드 http://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