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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과 향단의 화장에만 두 시간이 걸리더라구˝
2002-10-27

신상옥 감옥과 <동심초> <성춘향>으로 극영화 인생을 시작하다

“친애하는 리에게,한국에서 <휴전>을 촬영하는 동안 당신이 파라마운트 영화사에 제공했던 커다란 도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영화에 출연했던 많은 한국인들을 감독하는 당신의 능력과 더불어 당신의 영화에 대한 노하우와 영어 지휘가 없었다면 우리의 프로젝트는 심각한 곤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상영된 뒤 당신의 도움으로 찍은 장면들에 대해 우리는 이미 할리우드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성실과 재능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오언 클럼프 1953년”

나의 영화인생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사람을 미국에서 건너온 한명의 종군기자였어. 테드 코낸트라고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았던 젊은 친구였지. 나와 뜻이 맞아 10여년간 동고동락하며 기록영화 제작에 함께 했어. 제임스 B. 코낸트라는 컬럼비아대학 전 총장의 둘째아들로 하버드대학을 나와 녹음기사로 활동 중이었지. 그와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그뒤 한번도 떨어진 적 없이 형제마냥 같이 지냈어. 미군 관사에 들어가 같이 살던 만 9년간 매일 만났으니까. 여기저기 직장을 옮기는 동안에도 그와의 인연은 질기게 이어졌지. 1955년에 이르러, 전쟁과 아이들 문제를 다룬 기록영화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함께 제작했는데 극히 사회적인 다큐멘터리였어. 대금소리와 함께 동냥하는 아이들, 배급을 받는 아이들, 생활의 피곤에 찌들어 정신을 놓고 앉아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3분짜리 필름이었어.

전쟁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아이들을 변질시키고, 정치권력기구가 아이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 다루려고 애를 썼지. 그땐 젊을 때였으니까 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대하려고 했거든. 당시 코낸트와 나의 공통된 생각은 음악과 해설을 배제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자는 거였어. 그러니까 현실음만 가지고 영화를 찍자는 거지. 일체의 내레이션을 쓰지 않기 위해 현실의 소리를 정교하게 담아낼 필요가 있었어. 그래서 미군 트럭에 포장을 치고 마그네틱 리코더(자기 녹음기)로 녹음을 시도했지. 새로운 시도였어. 한참 뒤엔가 일본의 한 다큐멘터리스트가 세계 최초로 해설이 없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고 화제가 된 적 있었지만 나는 웃고 넘겼지.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만든 직후 <한국의 미술가>라고 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휴먼다큐멘터리에 도전했어. 미술가가 되고 싶었던 나이기에 작업하는 모습,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었지. 이 영화는 1956년 제1회 마닐라국제영화제에 초청됐고, 당시 미디어에 의해 올해의 주목할 만한 영화로 소개된 바 있어. 여기까지가 나의 영화인생 제1막에 해당하는 시기야. 53년부터 56년까지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기록영화 전반의 지식을 습득한 시기였지.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도 극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던 나는 결국 직접 극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기에 이르렀어. 그 첫 작품이 <불사조의 언덕>(1954) 이었고, 초판이 영문으로 쓰여졌지. 모두 미군을 염두에 둔 작업이었는데, 공보처에서 마침 직접 영화로 제작해준다고 나서더군.

결국 이 영화는 한미친선 영화로 제작돼 각국에 홍보영화로 활용되었지. 운크라의 원조 덕분에 비싼 자기 녹음기 두대를 들여와 영화를 찍었는데, 이로써 영화인생의 2막이 자연스레 열린 거지. 바로 극영화 시기가 도래한거야. 나의 본격적인 극영화 인생은 신필림에서 시작됐어. 57년 신상옥 감옥에 의해 기술부장으로 임명된 뒤, <동심초> <성춘향>을 직접 촬영할 수 있었어. 그때 신필림에는 신 감독을 중심으로 나와 장일호 감독이 각각 오른팔과 왼팔의 역할을 맡았지. 연출, 연기지도는 장일호 감독이, 전반적인 영화제작을 지휘하는 것, 기술적인 면을 총괄하는 것은 내가 맡았어.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충무로에선 새로운 영화제작 시스템만으로 화제가 됐지. 이스트만 칼라필름으로 찍은 <성춘향>은 세간을 놀라게 한 일대 ‘사건’이었어.

천연색 필름을 만져본 사람이 드문 충무로 현실에서 천연색 극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은 한국영화사에 큰 획을 긋는 거였어. 이미 <낙원제주>와 <코리안 퍼스펙티브>라는 천연색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바 있는 나로선 천연색 극영화도 그리 어렵지 않았어. 감히 단언하건대 <성춘향>은 제대로, 열심히, 정성껏 찍은 작품이야. 화장품도 아무거나 쓰지 않고 천연색 촬영용 화장품을 사와 직접 분장을 도왔지. 미8군에서 분장을 익힌 것이 도움이 됐어. 춘향과 향단의 화장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면 얼마나 정성이 들어간 작품인지 말 안 해도 알 거야. 필름도 주문하여 정식으로 수입을 해서 찍었어. 들여오는 데만 두달 정도 걸려 촬영일정이 오래 걸리긴 했지. 현상도 현상소에서 하다보니 이스트만 칼라영화로선 뛰어난 색감을 가진 성공작이 됐어. 대단한 흥행바람을 일으켜서 서울 인구 150만명 중 40만명이 다녀갈 정도였어.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로 신필림에서 활약하던 나에게 드디어 메가폰을 쥘 기회가 왔어. 1961년 <서울의 지붕밑>이 내 데뷔작이었어. 김희갑, 김승호, 허장강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이 영화는 서울의 한 한약방을 중심으로 노인 세 사람이 한 동네에 살면서 벌이는 인생사의 애환을 그린 희극이었어. 서울의 다양한 풍경을, 화가가 되고자 했던 나의 미적 감각을 살려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카메라 기법으로 각각의 숏에 채웠지.

구술 이형표/ 1922년생구술 50년대 미국공보원(USIS)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에서 군 홍보 및 기록영화 제작구술 미국 <NBC> <CBS> 특파원으로 활약하면서 뉴스 제작구술 60년대부터 극영화 86편 작업구술 <서울의 지붕밑> <말띠 여대생> <애하> <너의 이름은 여자> 등구술 80년대 중반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각종 전시관 기획, 설계, 시공 총괄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 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