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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분위기 찾아 유랑극단처럼 전국일주하는 <살인의 추억>

전남 해남군 황산면, 너른 갈대밭에서 80여명의 경찰이 성인의 키를 훌쩍 덮는 갈대를 헤치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크레인 위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이며 찍고 있는 이 풍경은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이다. 25일 언론에 처음 공개된 촬영현장은 갈대밭에 버려진 여성 실종자의 사체를 발견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자못 긴장된 촬영 현장 옆에서 박두만 형사를 연기하는 송강호씨는 조용구 형사 역의 김뢰하씨와 실뜨기를 하고 있다. 서울서 온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전경들과 함께 실종자의 사체를 수색하는 동안, 두 형사는 실뜨기로 하릴없는 시간을 달래며 실종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찍기 위한 ‘리허설’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삼엄한 사체 수색과 실뜨기 놀이라니. 부조화해 보이는 두 그림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영화화한 <살인의 추억>의 독특한 분위기를 집약해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이 고민 끝에 이 영화를 ‘농촌 스릴러’라 분류했다. “‘농촌’과 ‘스릴러’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충돌하는 이미지와 에피소드의 공존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가 될 것”이라는 게 봉 감독의 설명이다. 형사들이 밤낮없이 수사만 하고 또 명쾌하게 사건을 해결해내는 장르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로 들린다.

논리적으로 사건에 접근하려는 서울 형사와 발로 뛰는 지방 형사의 갈등은 이 드라마의 중요한 축이다. 전형적인 형사물이라면 복장에서부터 차이가 나겠지만 현장에서 두 사람의 초췌한 행색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또한 형사물이라면 거침없는 액션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런 장면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적 리얼리티가 아닌 날것의 사실성에 영화는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 사실성은 이날 촬영된 장면처럼 소름돋는 공포와 난데없는 웃음을 옆자리에 나란히 앉힌다.

지난 8월 말 시작된 촬영은 지금까지 전체의 40% 정도가 진행됐다. 해남, 장성, 부안 등 전남북 일대와 인천 강화, 강원도 횡성 등 스태프들은 전국을 “유랑극단”처럼 돌아다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80년대 중반의 분위기가 훼손되지 않은 곳을 찾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에서 치고 달리느라 그을린 얼굴이 <살인의 추억>으로 더 검어진 송강호씨는 “풀리지 않는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통상적인 추리물의 결론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마지막에는 가슴 짠한 여운을 주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2월에 경찰서 세트 촬영으로 마무리한 뒤 <살인의 추억>은 내년 봄께 관객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김상경 인터뷰

너무도 달라진 수척한 얼굴 옆에 두고도 “김상경 어딨지?”

촬영현장에서 만난 서태윤 역의 김상경(30)씨는 수척해 보였다. 배역을 위해 일부러 다이어트를 한 건 아니지만 매일되는 술자리 탓에 한참 몸이 불었던 <생활의 발견> 때보다 10kg 정도가 빠졌다. 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둔 머리칼은 귀밑을 덮었다. 사건 현장에서 그을린 얼굴을 만드느라 생전 처음 선탠까지 했다. 덕분에 촬영현장에 구경온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고도 “김상경 어딨니” 옆의 친구에게 묻는다고 한다.

“첫 영화가 독특해서 다음 작품 고르는 데 부담스럽지 않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렇지는 않았어요.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죠. 새벽 세시에 시나리오를 다 읽고 감독님과 통화하고 싶어서 밤을 샜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서태윤이 “틀에 박힌 인물이 아니라 좋다”고 했다. “서울서 온 형사라면 바바리 깃 날리는 엘리트적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근데 전혀 아니거든요. 중국집에서 사건을 가지고 심각하게 논쟁하다가도 “아줌마 짜장하고 면하고 따로 주세요”하는 말을 툭 던져요. 폼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죠.”

첫 영화 때 영화호흡에 적응하느라 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 영화는 많이 편해졌다. “텔레비전 드라마 같으면 벌써 수십 신을 찍었을 시간에 영화는 한 컷도 못찍는 경우가 많죠. 늘 쫓기면서 촬영하다가 하염없이 기다리려니 안절부절못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오히려 연기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서 좋습니다.” 김씨는 <살인의 추억>에서 서태윤이 관객들에게 “비현실적인 영웅심보다 인간으로서의 고민과 좌절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특별히 영화만 고수하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영화가 “내 몸에 꼭 들어맞는 옷이 될 때까지” 당분간은 몰두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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