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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만영화 마니아의 대만영화 14년 편력기(2)
2002-11-01

그날,<비정성시>가 나를 불렀다

신4_1995년_<세계영화기행>, 방송다큐멘터리와 책

얼마 뒤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 4·3항쟁을 소재로 <비정성시> 같은 영화를 만들려면 먼저 역사적 진실을 정리해야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던 1994년 말, 인디컴 프로덕션의 김태영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세계영화기행>이라는 방송다큐멘터리를 기획 중인데, 대만영화를 잘 아니까 ‘대만·홍콩’편의 연출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가만… 대만영화 책을 쓰고 싶지만 여의치 않고, 4·3 다큐멘터리도 암초에 걸렸으니 이 기회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까 그래, 다큐멘터리로 대만영화를 쓰자!

그때부터 구성을 맡은 이남진 작가와 몇달을 준비한 끝에 대만편 세계영화기행은 시작되었다. 촬영은 힘들었지만 <스크린> 인터뷰 때 사귄 분들의 도움으로 거의 모든 대만 영화인들을 만나서 취재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이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있었던 발견은 대만 뉴웨이브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당이 운영하던 국영영화사인 중앙전영공사 기획실에 입사한 시나리오 작가들의 힘이 컸다는 사실이었다. 대만 시나리오 작가의 삼인방인 우닌지엔, 샤오예, 주티엔원 모두에게 당시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신인 감독을 양성하기 위해 <광음적고사>와 <샌드위치 맨>을 옴니버스로 기획해 단 두편으로 7명의 감독을 데뷔시켰고, 대만의 현실을 다룬 <샌드위치 맨>이 국민당 검열에 걸리자 여론을 동원해 가까스로 영화를 개봉시켰다. 그래서 뉴웨이브는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취재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평론가이자 프로듀서인 페기차오였다. 특히 영화촬영 중에는 절대 인터뷰를 하지 않는 허우샤오시엔을 ‘협박’ 끝에 데려온 사람이 그녀였다. <남국재견> 현장에서 끌려온 감독은 그녀에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일단 인터뷰를 시작하자 이번에도 특유의 정열적인 태도로 성의있게 답변을 해 스탭들을 감격시켰다. 그는 <비정성시> 이후 93년 <희몽인생>, 94년 <호남호녀> 등 대만의 현대사를 다룬 세편을 계속 만들었고 이들 삼부작은 ‘비정 삼부곡’으로 불리며 대만영화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대만 뉴웨이브는 서정적 리얼리즘을 거쳐 역사라는 광대한 영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대만 역사를 바라보면서 느낀 감동이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동으로 이어졌을 뿐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촬영 뒤, 페기차오는 누님이 되었고, 허우샤오시엔의 조감독 출신인 슈샤오밍 감독은 술자리에서 형님이 됐다. 언제라도 술을 사주겠다는데, 불행하게도 대만은 술값보다 비행기 티켓이 비싸다.

방영이 끝나자 김태영 감독이 다른 제안을 했다. 촬영 분량이 많은데 1회 방송으로 끝나버려 아쉬우니 책을 만들자. 귀가 솔깃했고 그래서 <세계영화기행> 1권과 2권이 탄생했다. 20부작에서 다루었던 나라의 영화역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책을 쓰다보니 거의 2년이 흘러갔지만, 우린 편집자의 권한을 ‘악용’해 대만영화 원고를 남의 나라보다 두배나 많이 수록한 것을 스스로 기특해하고 있었다.

신5_1999년_노래로 태양을 쏘다

대만영화와의 인연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한국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투쟁을 1년 동안 촬영했고, 삼국유사의 전설을 인용한 <노래로 태양을 쏘다>란 제목을 건 90분짜리 다큐멘터리가 완성됐다. 그런데 베를린영화제 출품을 앞두고 페기차오 누님이 전화를 했다. 자신이 프로그래머로 있는 타이베이영화제에서 보여주자는 것이다.

영화제는 떠들썩했다. 세계적인 영화상은 다 휩쓸면서도 국내 흥행에서는 외면받던 뉴웨이브 관계자들이 마치 한국의 스크린쿼터 투쟁이 자기들 일인 양 발벗고 나선 것이다. 신문엔 매일 ‘한국영화인들, 미국에 저항하다’, ‘한국 영화인들, 노래로 한국영화를 구하다’ 같은 애국적인 카피의 기사들이 실렸다. 밤마다 대만 영화인들이 모여 스크린쿼터의 중요성과 할리우드의 폭력에 대해 토론했고, 난 그렇게 뭉친 대만 영화인들의 모습에서 대만 뉴웨이브가 성공할 수 있었던 다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만인들은 한국 영화인들이 독립투사인 것처럼 부러워했다. 그리고 VIP로 참석하셨던 부산영화제의 독립투사(김동호 위원장)의 엄청난 술실력에 하나씩 쓰러져 갔다….

에필로그 : 대만 뉴웨이브의 힘

오랜만에 본업인 시나리오에 매진하다보니 최근의 대만영화 소식에는 어둡다. 하지만 갈수록 대만 뉴웨이브의 기세가 많이 꺾이고 있다고 한다.

긴 시간 동안 대만영화를 쫓아왔지만, 한마디로 대만 뉴웨이브의 특징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대신 허우샤오시엔이 걸어온 길을 통해 동세대의 공통점을 추측할 수는 있다. 그는 초기에 시골을 배경으로 한 순박한 로맨틱코미디류의 대중영화를 찍던 감독이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성장을 바탕으로 한 <동년왕사>나 <연연풍진> 같은 서정적 리얼리즘의 단계를 거쳐, 현대사를 다룬 삼부작을 만들었고, 최근엔 추상적일 정도로 예술영화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물론 대만 감독들이 다 같은 색채를 지닌 것은 아니다. 흔히 뉴웨이브 2세대라고 분류되는 차이밍량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평가받는가 하면, 리안은 아예 할리우드로 넘어가 고전적인 방식의 대중영화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뉴웨이브의 정신에 가장 가까운 모델은 역시 허우샤오시엔의 서정적 리얼리즘영화이다. 많은 후배들이 그뒤를 따르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공통의 영화언어를 갖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힘은 영화언어를 관통하는 정서적 힘에 있었다. 그 정서 역시 뉴웨이브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재산이었다. 그들이 성장영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과거를 통해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것이고, 그런 서정적 노력은 자연스럽게 대만의 역사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대만영화의 정서적 힘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 것 같았다. 하지만 작가영화와 대중영화의 간극이 너무 먼 점은 심각하다. 한 나라의 대표작이 모두 작가영화라는 것은 어쩌면 매너리즘의 징후일 수도 있다. 대중영화라는 기반이 취약하면 결국 작가영화의 기반도 무너지기 쉽다.

<비정성시>와 만난 지 14년이 흘렀다. 과연 나는 대만영화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영화지식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만약 아직도 영화를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렇게 세상을 사는 자세는 대만영화와 대만 영화인에게서 배운 것임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예술은 인생을 모방한다 가끔은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

제주도 사람들이 좋아했던 <동년왕사>같은 성장영화를 한국에도 대중화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4·3항쟁 극영화는 가능할까 어쨌든 대중영화도 튼튼히 만들고, 대만처럼 작가영화의 르네상스도 여는 것이 대만영화 키드였던 충무로 키드의 ‘철없는’ 꿈이다. 조재홍/ 연세대 시나리오 창작센터 실장<세계영화기행> 다큐멘터리 연출<세계영화기행>(거름 펴냄)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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