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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만영화 마니아의 대만영화 14년 편력기(1)
2002-11-01

그날,<비정성시>가 나를 불렀다

프롤로그 : 제주도 사람들의 베스트 원

제주 민예총이 주관하는 영화행사였다. 일주일 동안 강의하면서 7편의 고전영화를 상영한 뒤 수강생들에게 어떤 영화가 제일 좋은가라는 설문을 돌렸다. 무협영화 같은 대중적인 장르영화도 끼어 있었지만, 최고의 영화로 꼽힌 것은 의외로 대만의 <동년왕사>였다. 전혀 영화 같지 않고, 일상을 담담히 기록한 것 같은데도 너무나 감동적이었다는 것이다. 대만영화 운운하면 골치아픈 예술영화 대접을 주로 받던 때이니만큼, 제주도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 신선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핵심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그 점이 대만영화의 진짜 힘이니까.

난 80년대에 영화공부를 시작했고, 지금도 다행히 영화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그런 세대에 속한다. 같은 세대라도 성장과정은 조금씩 다른데, 힘든 시간 속에서도 내게 영화를 계속하도록 힘을 준 에너지원이 있다면 바로 폴란드영화와 대만영화이다. 특히 대만영화를 보기 위해 타이베이를 오간 돈을 저금했다면 지금쯤 비행기를 한대 사서 전세를 놓아도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농담을 할 정도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대만 신전영 탄생 20주년 특별전’이 열린다는 소식은 그래서 특히 감회가 깊다. 이 기회에 개인적인 기억의 풍경을 통해 아시아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과 공감의 자리를 가지려고 한다. 할리우드 키드가 아닌 대만영화 키드의 일기인 셈이다.

신1_1989년_화양극장, 비정성시

최초로 대만의 작가영화를 본 것은 아마도 1987년. 서강대학교의 커뮤니케이션센터가 주관한 중국·홍콩·대만 ‘3대륙영화제’에서 에드워드 양의 <청매죽마>(타이베이 스토리)를 봤다. 도시 중산층의 일상을 소재로 한, 안토니오니를 연상케 하는 모던한 영화였다. 하지만 ‘대만도 잘 만드네’ 정도였을 뿐 더이상의 기억은 없다.

몇년 뒤, 나는 창립 멤버였던 인연으로 퇴직 뒤에도 월간지 <스크린>에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때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비정성시>가 수입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청매죽마>의 기억이 살아나 수입사에 시사를 요청했다. 시사회날 아침 7시경. 서대문 로터리에 있는 화양극장. 관심들이 없었는지 너무 이른 시각 때문이었는지 영화관계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텅 빈 넓은 극장에서 한 사람을 위한 시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날, 그 감동은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롱테이크, 롱숏, 자막 사용, 생략미…. 영화미학의 수준도 대단했지만, 내게는 그 영상들을 뚫고 지나가는 일상적인 정서의 힘이 더욱 인상깊었다. 서정성이 어떻게 역사와 만나는가를, 인간을 제대로 그렸을 때의 감동이야말로 극영화의 본령이라는 상식을 깨닫게 해준 영화였다. 특히 허를 찌르는 마지막 숏은 작은 충격이었다. 그랑프리 과연 어떤 멋진 장면으로 영화가 끝날까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 형제가 운영하는 식당의 허름한 입구를 보여줄 뿐이다. 이게 뭐야 잠시 당황했지만 곧 감탄사가 나왔다. 남루한 일상의 공간을 통해 한 집안의 운명, 한 나라의 운명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대만영화와의 극적인 조우였고, 허우샤오시엔 감독과의 첫 만남이었다.

1980년대는 중국의 5세대, 대만의 뉴웨이브 등 아시아영화가 자신의 역량을 세계에 과시한 역사적인 시기였다. 또한 한국의 영화 마니아에게도 서구영화를 소화하고 모방하는 대신, 아시아 영화미학으로도 세계와 겨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시기였다. 그래, 대만을 벤치마킹하면 우리 영화도 새로워질 수 있다! 이때부터 대만영화를 공부하기로 결심했지만, 지금과 달리 대만영화 연구자료는 너무 귀하던 때였다. 다른 숙제도 생겼다. 대만인은 국민당이 저지른 2·28학살을 소재로 <비정성시>를 만드는데, 우리는 왜 4·3항쟁을 영화로 못 만드는가라는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신2_1990년대 초반_타이베이, 영화자료실

군 제대 뒤에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그때부터 잔금을 받으면 대만을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대만영화는 몇편에 불과하여 아무리 책을 읽어도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막상 타이베이에 도착하니 영화학과는 한 군데도 없고, 지나간 대만영화를 볼 여건도 나빴다. 몇번의 여행 끝에야 겨우 찾아낸 곳이 당시 칭뻬이루에 있던 ‘영화자료실’. 시설은 빈약했지만 자국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요 감독들의 초기작은 물론 아직 한국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그중의 백미는 왕통 감독의 <허수아비>였다. 아니, 이 사람들이 코미디까지 왕통 감독은 뉴웨이브와는 상관없는 구세대 영화인이고 그의 영화는 평범한 대중영화 스타일이었지만 역시 대만인의 정서를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갈수록 대만영화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지만, 새로운 궁금증도 생겼다. 대만영화의 정서적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대부분의 대중영화들은 기대 이하였다. 신파조의 멜로드라마에 엉성한 전쟁영화, 새마을영화 등 우리 영화보다 낙후한 수준이었다. 대만은 작가영화와 대중영화의 간격이 너무나 컸다. 외국 평론들이 즐겨 다루는 대표작들을 모두 봤을 무렵, 대만영화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성장영화라는 것도 알았다. 대만 뉴웨이브의 효시라고 하는 82년작 <광음적고사> 이후 많은 영화인들이 성장영화를 자연스럽게 시도하는 것도 한국영화와 크게 다른 풍토였다. 그들은 잠깐 멈추어 서서, 자신들의 삶을 차분히 되돌아볼 줄 알았다.

신3_<스크린> 인터뷰를 빌미로 삼다

비디오 10여편 보면 돌아오고, 돈 생기면 다시 가는 이상한 유학()생활을 계속하면서 허우샤오시엔 감독을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늘 허탕이었다. 머릴 짜내다가 <스크린>과 손을 잡기로 했다. 개인 자격보다는 영화잡지의 이름을 빌리면 인터뷰가 쉽지 않을까 다행히 작전 성공. 드디어 영화로만 만나던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을 만났다. 두 감독은 친구였지만, 라이프 스타일도, 성격도, 영화관,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달랐다. 인터뷰할 때 허우가 격정적인 연설가 같다면, 양은 차분하고 논리적인 변호사 같았다. 허우는 늘 서정성을 중시하면서 대만인을 따뜻하게 그린다. 양은 늘 타이베이의 도시인을 차갑게 응시한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상이한 영화스타일을 가졌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나라의 삶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우 감독에게 질문했다. “당신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빈 공간은 동양미학의 여백과도 유사하다는 비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말했다. “여백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결코 빈 공간이 아니다. 한 공간에는 그곳을 스쳐간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흔적이 남아 있다. 난 그것을 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감독들과의 인터뷰 작업은 책과 영화에만 의존하던 단계를 뛰어넘어 그들과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대만영화를 이해하게 된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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