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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양 인터뷰
2002-11-01

˝나는 대만영화를 죽이는 나쁜 놈이라더라˝

대만 뉴웨이브를 끈 동력은 무엇인가

→ 내가 영화 만들 기회를 얻었을 무렵, 대만의 정치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1979년 카터 행정부는 중국 본토를 중국의 공식적인 정부로 인정했다. 중국은 자족과 자부심에 들떴지만, 대만은 정반대였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세대에게 하나의 정점을 의미하게 됐다. 우리는 자부할 만한 무언가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찾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던 나는 대만으로 돌아가 친구가 찍는 영화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운명적이었던 것 같다. 그때 우리 세대는 갑자기 성숙해졌다. 오래된 관습은 모두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기 때문에, 창조적인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최고의 기회였다. 대만 뉴웨이브영화는 바로 그런 자각에서부터 시작됐다.

뉴웨이브의 감독들이 출발부터 어떤 유대를 갖고 있었다는 얘긴가.

→ 나는 대만 뉴웨이브의 리더였다. 허우샤오시엔 같은 감독들이 모두 우리 집에 모여 이야기하고 웃고 술을 마셨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것을, 하지만 허락되지 못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 누구도 우리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당신은 미국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했다. 언제부터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했는가.

→ 플로리다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지만, 영화가 하고 싶어서 남캘리포니아대학 영화과로 옮겼다. 하지만 포기하고 7년 동안 컴퓨터 디자인을 공부했다. “난 영화감독이 될 소질이 없나봐”라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날, 시애틀 시내에서 극장간판 하나를 보게 됐다. 거기엔 ‘독일 뉴웨이브: 아귀레, 신의 분노’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그 영화를 보러 들어갔고, 내 인생은 바뀌었다. 어머니는 몹시 낙담하셨지만, 그것은 내가 정말 원하던 바였다.

뉴웨이브 이전 대만에서 주류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일이었는가. 그리고 당신이 영화를 찍기 시작한 이후 대만 영화문화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 대만 영화산업은 중국과 매우 비슷했다. 정치적 선전에 복무했다는 뜻이다. 국가적인 영웅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수백만달러를 쏟아붓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리를 지키고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영웅의 삶을 찬미하는 식이었다. 꼭 스탈린주의 같았다. 그런 영화산업이란 음울하기 짝이 없다. 지금까지도 영화계 사람들은 자신의 프로페셔널한 재능을 프로파간다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여론을 조종하고 싶어하는데, 요즘은 특히 그런 걸 민주사회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영화를 찍으면서 자신의 시각을 투영하려 하는 편인가, 혹은 관객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맡기는 편인가.

→ 의도적으로 내 시선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나는 무엇이든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중립적으로 전달하고 싶다. 관객이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영화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느낄 때, 나는 그것을 중립적인 위치에서, 인간의 보편성으로 묘사하고 싶다.

<하나 그리고 둘>은 대만 관객에게 어떤 평가를 얻었는가.

→ 아직 대만에서 개봉하지 못했다. 배급이 어렵기 때문이다. 대만에서 배급은 대만영화의 존재를 위협하는 이유 중 하나다. 언론도 대만영화가 대중 속에 자리잡는 데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심어주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대만영화를 죽이는 나쁜 놈이다. 내 영화가 흥행이 잘된 적도 없고, 내가 영화제 수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나. 그런 소리에 신경쓸 여유는 없다. 차라리 시나리오나 구상하고, 내 영화에 투자해줄 사람들과 어떻게 영화를 팔 것인지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 대만 배급업자들은 더이상 제작에 투자하지 않는다. 낡아빠진 대만 영화산업은 새로운 시장이나 새로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 그리고 둘>은 당신의 영화 중 유럽과 북미에서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작품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 이 영화가 그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걸 보고 많이 놀랐다. 이 산업에 몸담아온 시간이 그만큼 오래됐다는 반증일까. 처음부터 나는 내 영화가 질에 관한 한 믿을 만하다는 평가를 얻도록 힘을 기울였는데,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노력하다보니 졸업할 때가 된 것이다. 행운도 많이 따랐을 것이다. 내년엔 이런 행운이 다른 감독들에게 갈 수도 있겠지. 이런 말이 들리는 것 같다. 그래, 좋아, 다음 단계로 갈 준비가 됐지 나는 내 삶의 초반부보다 후반부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더 기쁘다.

<하나 그리고 둘>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탔지만 각본상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쓴 글을 본 적 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완전한 형태로 완성하는가, 아니면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즉흥적으로 쓰는가.

→ 두 방식 다라고 할 수 있겠다. 시나리오와 연출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여야만 한다. 두 가지를 분리할 수는 없다. 처음 시나리오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건 머리 속에서 전구가 깜박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뒤 영화를 완성할 때까진, 모든 제작과정이 ‘쓰기’에 포함된다. 촬영, 편집, 프리 프로덕션, 배우 오디션 전부다. 즉흥연출도 물론이다. 내가 대만 영화산업의 메인스트림에서 작업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가난하게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가능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 즉흥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데 능숙해져야 했다.

지금 아시아영화는 매우 주목받고 있다. 당신은 그 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아시아영화는 새로운 세대의 영화다. 우리는 100년이 넘도록 서구영화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왔고, 마침내 이 정도 위치에 이르렀다. 가장 먼저 일본, 그 다음엔 한국, 그리고 대만, 홍콩, 싱가포르, 지금은 중국이 그렇다. 아시아영화의 약진이 곧 유럽영화가 쇠퇴하는 징후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시아영화가 좀더 풍성하고 훌륭한 영화를 생산해내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매우 단순한 사실이다.정리 김현정 parady@hani.co.kr

※ 이 인터뷰는 <시네아스트> <가디언> <센스 오브 시네마> 등에 실린 인터뷰를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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