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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시엔 인터뷰
2002-11-01

˝영화제작이란 역사와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

"<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는 기억과 대만 역사에 관한 영화들이다. 나는 이들 시대를 포착하려 했는데, 그것은 당시가 대만이란 나라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관해 알려고 하지 않거나 왜곡된 이해를 하고 있다. 나와 비슷한 세대의 영화 제작자들은 항상 그런 점에 상당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들 문제에 맞서는 것이 우리 세대의 임무라고 의식하고 있다."

당신의 영화는 대만의 역사와 생활상을 다뤄왔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 나는 대만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비로소 대만의 역사에 관해 알게 된 것은 <비정성시>를 만들 때부터였다. 당시 나는 대만의 역사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다. 영화제작이란 역사, 사람, 인생 그 자체에 관해 알아나가는 과정이다. <희몽인생>은 내가 공부해온 과정의 성적표인 셈이다.

처음 영화를 만들던 1980년대 초반부터 당신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 젊은 시절 내가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 상당수의 작업은 축적된 개인적 경험에 기반했다. 개인적 경험을 축적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시야를 넓혀준다. 또 그런 과정은 역사적 주제에 관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10년 정도 그런 영화를 만들다보니, 너무 한 분야에만 익숙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들어 내 영화들 사이의 공백이 길어진 것은 나이가 들면서 더 오래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 탓인 듯하다. 사실 나는 사람이 늙으면 영화 만드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고도 느낀다.

최근작인 <밀레니엄 맘보>는 어떻게 출발한 것인가.

→ <호남호녀>를 촬영할 때, 현대 부분을 찍으면서 대만의 현재적 삶을 담는 게 나로서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밀레니엄 맘보>의 주제를 선택하면서 내 영화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대만 현대사를 영화화하는 작업을 끝냈고, 지금은 대만의 현재적 모습에 초점 맞추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난해 <밀레니엄 맘보>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대만 젊은이들에 관한 3부작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 지금 생각은 좀 바뀌어 더 많은 영화를 만들 것 같다. 모두 몇편짜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3부작보다는 많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에 담고 있는 젊은이들의 삶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애초 나는 동시에 3편의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여섯개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배급사는 3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찍고, 완성한 뒤, 배급한다는 내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3편을 한꺼번에 배급하는 게 어렵다면서 “일단 1편부터 먼저 만들자구”라고 말했다.

대만에서 <밀레니엄 맘보>는 어떤 반응을 얻었나.

→ 3천명 정도의 관객만이 극장을 찾은 것 같다.

상업적 재앙이라고 말할 수 있나.

→ 그렇다.

반면 <비정성시>는 당신의 최고 성공작이었다.

→ 맞다. 200만명이 이 영화를 봤다. 1989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비정성시>는 그 정도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을 받은 대만영화였다.

영화제 수상이라는 게 꼭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

→ 당시 사정은 달랐다. 1989년 당시만 해도 베니스 대상 수상은 국가적 자부심을 수반했다. 대만영화가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대만에서 계엄령이 해제된 게 1987년이라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한다. 그전까지 엄청난 규제가 있었고, 검열도 심했다. 신문과 잡지의 숫자도 제한됐고, 입에서 꺼낼 수 없는 소재도 많았다. 87년 이후 신문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자 엄청나게 많은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신문은 석간판을 내기 시작했고 급진적인 신문도 탄생하게 됐다. 사람들은 이전까지 허용되지 않았던 일을 할 수 있었다. <비정성시>의 주제 또한 당시로선 매우 논쟁적이었다. 그것은 대중적 매체로선 처음으로 2·28사건을 다뤘던 시도였다. 현재까지도 터부시되는 주제인 국민당의 ‘백색테러’를 다룬 <호남호녀>는 일부 도시에서만 제한적으로 상영됐고, 상영일도 2∼3일밖에 되지 않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사실 30대 이하의 사람들은 그런 사건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은 아니지 않나.

→ 그렇다. 그것은 전적으로 정부의 문제다. 이 사건은 중등교육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고, 혹 등장한다 해도 왜곡되어 있다. 이것이 내가 이들 영화를 만든 이유다. <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는 기억과 대만 역사에 관한 영화들이다. 나는 이들 시대를 포착하려 했는데, 그것은 당시가 대만이란 나라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관해 알려고 하지 않거나 왜곡된 이해를 하고 있다. 나와 비슷한 세대의 영화 제작자들은 항상 그런 점에 상당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들 문제에 맞서는 것이 우리 세대의 임무라고 의식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이들 문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대만은 60년대 이후 70, 80년대를 거치며 엄청나게 변화해왔다.

당신은 인터넷 업체를 운영하며 ‘시노무비’(www.sinomovie.com)라는 웹사이트를 갖고 있다. 스스로를 비즈니스맨이라고 생각하는가.

→ 인터넷 업체 또한 제작사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영화를 배급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 거기까진 이르지 못했다. 나는 젊은 감독의 영화를 키우고 싶고 그 작품을 대만에서 배급하고 싶다. <밀레니엄 맘보>는 여기서 만든 첫 장편영화 하나를 만들었다. 다큐멘터리 한편과 20편의 TV광고도 만들었다. 지난해 말, 그 20편의 광고 덕분에 우리는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 정리 문석 ssony@hani.co.kr

※ 이 인터뷰는 <시네아스트> <시네마야> <타이완 필름스> 등에 게재된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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