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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뉴웨이브 20년의 힘 [3]
문석 2002-11-01

정부의 정책 또한 자국영화의 진흥과는 관계없이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 이때 50여명의 대만 영화인들은 ‘대만 신영화 선언’을 발표했다. “우리는 영화가 의식적인 창작활동이고 예술활동이며 반성과 역사인식을 가진 민족의 문화활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선언은 정부의 영화정책, 언론의 무책임한 태도, 평론의 왜곡 등을 차례로 꼬집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불행히도 초기 뉴웨이브 세대 중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을 제외한 대부분의 감독들은 영화시장에서 차례로 밀려나 TV와 CF, 학교 등으로 후퇴하게 됐다. 89년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가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곧 대만영화의 상황은 다시 암울해졌다.

이른바 뉴웨이브 2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감독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이때였다. 90년에는 황밍추안 감독이 중앙전영 등 기존 영화사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첫 순수 대만 독립영화’ <서쪽 섬에서 온 사나이>를 선보였고, 91년엔 리안이 뉴욕에서 <쿵후선생>을 만들어왔고, 다음해엔 차이밍량이 <청소년 나타>로 세계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장초시 감독이나 린청솅 감독 등 새로운 얼굴들도 차례로 등장해 더욱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일종의 공동체처럼 지냈으며 서로의 작업을 도왔던 1세대 뉴웨이브 감독과 영화인(허우샤오시엔은 에드워드 양의 <청매죽마>의 시나리오를 썼고 남자주연을 맡았으며, 우닌지엔은 자신이 시나리오를 썼던 <비정성시>에 출연하며, 허우샤오시엔의 <동동의 여름방학>에는 에드워드 양이 출연한다)들과는 달리 출신도 다른데다 지향점도 모두 달랐던 탓에 하나의 경향으로 한데 묶어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세대가 쌓아놓은 토양과 계엄이 해제된 상황 위에서 영화를 시작했던 이들은 이전까지는 금기시됐던 주제들을 과감하게 소화했고, 좀더 현대적인 문제의식을 소화했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뉴웨이브의 첫 파도를 흘려보낸 지 20년이 지난 지금의 대만 영화계는 젊은 평론가 레지나 호의 입을 빌리면, “대만 영화계는 한마디로 기아상태를 헤매고” 있다.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같은 거장과 차이밍량, 장초시, 린청솅 등이 활발하게 영화를 만들며 세계영화계가 대만영화의 미학을 칭송하고 있던 90년대, 대만 안에서의 자국영화는 서서히 바닷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할리우드영화가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대만에서 대만영화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99년 만들어진 대만영화는 고작 14편이었으며, 이들이 동원한 관객 수 또한 60만명에 불과했다. 예술영화의 경우는 더 심각한 상황이다. 1989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이라는 화려한 휘광을 업고 20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비정성시>의 영화(榮華)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영화제의 성가가 흥행에선 오히려 악재가 된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셈이다. 칸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한 차이밍량 감독의 <구멍>은 불과 4일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고,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은 아직까지 대만에서 상영되지 못하고 있다. 대만의 다른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도 마찬가지 대접을 받고 있다. 때문에 대만 내에서 자본을 구하기 어려워진 이들 작가들을 제작파트너를 찾기 위해 유럽과 일본 등지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다.

미학적 성공, 산업적 실패

한 대만 평론가의 이야기처럼 대만 뉴웨이브영화들은 “영화의 미학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확실하지만 견고하고 광범위한 영화산업의 구축에는 실패했다”. 대만의 언론들은 이같은 대만영화 산업의 몰락의 책임을 바로 20년 전 뉴웨이브의 물결을 일으켰던 장본인들에게 돌린다. 예술영화를 만들던 이들이 산업적인, 그리고 상업적인 측면은 도외시한 탓에 대만의 관객을 잃었고 영화산업의 기반마저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뜻있는 대만의 영화인들은 대만 영화산업의 몰락은 뉴웨이브의 탓이 아니라, 영화산업을 도외시한 정부의 정책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부의 보조금 정책은 유명무실해졌고, 할리우드영화를 견제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만들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웨이브 도래 20년을 맞는 대만영화계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후 대만영화계의 사정이 20년 전과 같으리라고 예측하지 못한다. 올해 청원탕 감독이 데뷔작 <몽환부락>을 만들며 들인 제작비는 1982년 <광음적고사>에 들었던 제작비와 같으며, 이조차도 온갖 어려움 끝에 얻어낸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만영화계가 뉴웨이브의 물결을 계속 앞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지 회의가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려운 상황에도 아직도 굉장히 많은 젊은이들이 영화를 갈망하고 있으며, 영화를 자기 손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전과 달리 이들 대부분은 케이블TV나 CF, 뮤직비디오를 만들면서 영화쪽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고 있다”는 레지나 호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앞으로 나타날 대만의 ‘포스트 뉴웨이브’ 세대는 이전 세대와 두드러진 금을 그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대만의 새로운 영화가 일거에 무너질 것이라 예측하는 이도 흔치 않다. 밀물이 있으면 언제나 썰물이 있는 법이고, 그러고 나면 또 밀물이 들어올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