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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뉴웨이브 20년의 힘 [2]
문석 2002-11-01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982년, 에드워드 양을 비롯한 4명의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광음적고사>의 등장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한 귀퉁이의 작은 섬나라에서 만들어진 이 저예산 ‘모듬영화’가 곧 세계영화계를 흔들어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만의 ‘신랑차오’(新浪潮), 즉 대만 뉴웨이브영화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평가되는 그 영화는 그렇게 조용히 꼬리치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1982년 <광음적고사>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라는, 실로 대만이라는 나라를 꿰어내는 것은 무망한 짓이었다. 대륙에서 권력을 잃은 장개석 장군이 49년 대만에 자신의 깃발을 꽂은 이후 대만의 영화는 체제를 홍보하거나 반공정신을 고양하는 나팔수 역할을 해왔다. 60년대 이후 대중작가인 경요(瓊瑤)의 애정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나 홍콩 무협영화의 모사작 등 상업영화가 대거 생산돼 인기를 얻은 것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프로파간다영화 대신 비정치적 영화가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그나마 발전이라 평가할 수 있는 요소였다 (경요의 소설은 20년 동안 50여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물결이 등장한 82년 이후 대만영화의 지형도는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때 ‘국산영화를 거부하자’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칠 정도로 영화다운 자국영화를 갈망하고 있었던 대만의 지식인들은 <광음적고사>를 두팔 벌려 환영했고, 이같은 열띤 반응은 83년 첸쿤호우 감독의 <샤오피 이야기>와 허우샤오시엔 등 세명의 감독이 만든 옴니버스영화 <샌드위치 맨>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후 20년 사이에 허우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감독은 어떤 영화제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대만의 뉴웨이브영화는 세계영화의 문법과 사상을 변화시키는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도대체 82년 대만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만 뉴웨이브영화는 왜, 어떻게 그토록 갑자기 세계영화계의 중심으로 등장했고,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걸까.

82년 대만에서 무슨 일이?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의 말마따나 대만 뉴웨이브영화의 급작스런 득세를 설명하려면 “단문으론 부족하고 책 한권 분량이 소요될 것”이 틀림없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첫째로 홍콩-대만-중국, 즉 3중국의 상호영향을 꼽을 수 있다. 70년대 말부터 허안화, 서극 등으로부터 촉발된 홍콩 뉴웨이브는 대만으로까지 그 파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의 영화뿐 아니라 대만에서 활동한 일부 홍콩 뉴웨이브 감독들의 작업은, 뭔가 큰 변화를 원하고 있던 대만의 기존 감독이나 유학파 영화인들을 자극했다. 이처럼 대만 뉴웨이브는 홍콩의 뉴웨이브에 힘입은 바 크고, 이는 중국 5세대 영화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대만사회의 급격한 변화였다. 군부독재 정권의 정치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이후 놀라운 경제성장을 거듭하면서 대만사회는 놀라울 만한 속도로 바뀌어갔다. 도시에서 태어나 고도 성장기를 겪으며 사회적 문제의식을 쌓은 전후 세대들이 차례로 영화계로 입문했다. 새로운 관객 또한 기존 대만영화와 다른 참신한 작품들을 원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국면에 돌파구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졌다. 정부가 개방적인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것. 대만 정부는 81년 영상물법의 초안을 작성하면서 영화에 대한 검열을 실질적으로 폐지하는 조치를 취한다. 예컨대 이전까지는 대만의 국익에 반하는 내용, 민족의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것, 성적으로 문란한 내용이나 도덕적 타락과 관련되는 내용 등은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없었지만, 이후로는 큰 제한없이 대부분의 소재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집권 국민당의 영화사나 다름없던 중앙전영공사(CMCP)의 사장으로 덜 보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던 밍치라는 관료가 임명됐고, 대만 뉴웨이브 탄생의 숨은 산파인 시나리오 작가 우닌지엔과 샤오예는 중앙전영 기획실로 들어갔다. 대만사회의 현실을 담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중앙전영을 설득해 <광음적고사>를 기획하게 된다. 우닌지엔과 샤오예는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이 영화가 국민당이 이뤄낸 경제발전 등을 그리게 될 것”이라며 간부들을 속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또 4명의 신인 감독을 기용하고 아마추어 배우를 기용하면 제작비도 적게 들 것이라며 ‘미끼’를 던졌다.

대만 뉴웨이브의 첫 고비는 물결이 치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찾아왔다. 우닌지엔과 샤오예가 다시 기획한 3부작 옴니버스영화 <샌드위치 맨>에 대한 여론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눈부신 경제발전 와중에 뒤처진 소외계층과 일본, 미국 같은 외세에 대한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는 이 영화가 등장하자, 국민당과 보수언론은 상영을 못하게 해야 한다는 여론을 퍼뜨려나갔다. 우닌지엔과 샤오예는 기자와 평론가 등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반대여론을 만들어냈고, 결국 이 영화는 무사히 대만에서 상영할 수 있었다. <샌드위치 맨>의 상영은 대만 영화인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소재를 갖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했고, 이는 대만 뉴웨이브의 안정화를 의미했다.

40년 가까이 지속되던 계엄령이 해제된 87년은 대만 뉴웨이브에서 중요한 해로 기록된다.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감독을 필두로 한 이들 새로운 감독들의 영화는 세계영화제와 비평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정작 대만 안에서는 비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기존 영화계와 언론들은 뉴웨이브영화의 새로운 미학적인 시도와 비 전문배우 중심 캐스팅이 관객을 대만영화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스타 시스템을 붕괴함으로써 상업영화 시장의 기반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