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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감독의 <밀애> 제작일지(4)
2002-11-02

감독은 욕망한다,몸의 격정을

2002년 7월8일

태풍으로 인한 휴식. 내일부턴 다시 촬영이다. 오랜만에 스탭들과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60여명이나 되는 스탭들. 다큐멘터리를 찍을 땐 함께 일하는 모든 스탭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선 불가능하다. 최대한 소통하려 애쓰지만 쉽지는 않다. 동시녹음을 하는 이영길 기사님을 제외하면 내가 나이가 제일 많다. 동년배를 찾아보니 촬영버스를 운전하는 원상씨와 프로듀서 혜은이뿐이다. 스탭들은 모니터쪽이 아니라 카메라 바로 뒤쪽에 항상 있는 내가 처음엔 좀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난 모니터를 신뢰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니터 화질도 나빠서 배우들의 연기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카메라 바로 뒤에서 배우들을 보다보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함께 호흡을 하는 느낌, 촬영을 하는 느낌이 든다.

2002년 7월15일

남편인 효경에게 미흔이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폭발시키는 장면을 찍는 날이다. 이곳 남해 오픈 세트장은 동물원 같다. 낮에는 수만 마리의 파리가 서식하고 밤에 조명을 켜면 생전 보지 못한 종류의 벌레들, 심지어 슬쩍 보면 새나 박쥐처럼 커다란 나방 수천 마리가 조명기를 향해 돌진하고 주위엔 개구리들이 합창을 하는 종합 사파리 같다. 어느덧 배우들도 현장에서 끊임없이 콘티와 상황과 감정과 대사를 바꾸어가는 나에게 적응을 한 듯하다. 사실 그 모든 변덕은 나에겐 책임이 없다. 촬영 전에 했던 나의 상상을 넘어서는 감정을 현장에서 보여주는 배우들과 현장에서 상황에 맞추어나가는 촬영감독의 빛 조율은 나로 하여금 또한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하니까. 조금씩 시나리오와 멀어져 가는 현장을 지켜보던 신혜은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오른다. 자식… 내 생각을 읽었구나. 지겹지만 힘이 되는 영화동지.

2002년 8월7일

양수리 세트장에서 실내신들, 특히 미흔과 인규의 정사신들을 찍기 때문에 나름대로 스탭들이 긴장해 있다. 양수리 종합촬영소는 대단한 공간이다. 밖의 소음이 아주 잘 들리는 신기한 구조를 갖고 있다. 심지어 소음으로 인해 에어컨을 이용할 수 없다. 투덜투덜 짜증을 내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지나가던 관람객 한분이 슬쩍 세트장 안으로 들어온다. 제작부한테 마구마구 소리를 질렀다. 스트레스가 좀 풀린다. 고마운 관람객이다.

인규는 이제 완전히 내가 생각하던 인규를 표현하고 있다. 신나는 일이다. 그의 얼굴은 정말 매력적이다. 퇴폐적이면서도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단 하나의 아쉬움이 있다면 감정을 표현하려고 너무 애를 쓸 때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에 대한 자신감 부족인가 슬쩍 그에게 다가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점심에 뭐 먹을지를 생각해 보라고 부추긴다.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는 그도 어느덧 자신을 믿기 시작한다. 그런 거 같다.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결과물이다. 자신을 믿고 가는 것. 그것이 과정이고.

2002년 8월8일

정사신을 찍었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결국 정사신은 액션신이다. 서로의 몸 동작이 정확하게 일치해야 하는…. 어렵게어렵게 밤을 새워가며 촬영을 했다. 촬영을 하다 며칠 전 일이 생각났다. 어떤 기자가 나에게 정말 영화가 야하냐고 물어봤었다. 야한 게 뭘까 그건 정말 취향의 문제일 텐데…. 각각의 취향에 맞추려면 스무 가지 이상의 버전을 만들어야 하나 차라리 당신 정사신의 특징은 무어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있다. 인물의 감정의 흐름과 과정에 동참할 수 있게 만드는, 특히 여성들을 축축하게 젖게 만들고 싶다고….

2002년 9월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시작했다. 영욱이 형(음악감독)은 나에게 엔딩음악을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이다. 하긴 판권문제까지 해결하려면…. 두곡의 음악 중에 결정을 못하고 있다. 하나는 존 바에즈의 <도나도나>, 다른 하나는 닐 영의 노래를 린다 론스타드가 부른 <애프터 더 골드러시>. 촬영현장에서 영욱이 형이 보내준 영화음악 후보곡 ‘사제 컴필레이션’ 시디를 언제나 듣곤 했지만, 현장에선 후자가 좋았는데 막상 편집을 하니 엔딩에는 도나도나가 더 어울리는 듯하다.

2002년 지금

기술시사를 했다. 제작부 막내 혜정(류승완 감독과 함께 사는 여자)씨가 영화를 보고 난 뒤 나에게 이제 미흔의 감정이 완전히 이해되었다며 빵실빵실 웃는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 나에게 만족하냐고 묻는다. 물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으론 최대치를 한 거니까. 다만 내 능력의 최대치가 앞으로 더욱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 흡사 며칠 전 시작한 온라인 게임 ‘신영웅문’의 내 캐릭터의 능력치와 내공의 최대치가 더욱 커지기를 바라는 것처럼….변영주/ 영화감독, <낮은 목소리>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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