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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감독의 <밀애> 제작일지(3)
2002-11-02

감독은 욕망한다,몸의 격정을

2002년 6월17일

남해에서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윤진씨에겐 미흔의 귀신이 붙은 것 같다. 미흔이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만성적인 두통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찾지 못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 날엔 어김없이 윤진씨 자체의 몸 상태가 나빠진다. 심지어 장염까지 앓아 얼굴이 정말 아픈 상태로 보인다. 낮의 야외신에서도 우린 조명을 했는데, 때아닌 초여름 더위와 조명에 윤진씨는 거의 쓰러질 듯 보인다. 촬영을 시작한 첫날부터 난 모든 배우들을 일상에서도 극중 배역 이름으로 부른다. 어느 순간 배우와 캐릭터가 나에겐 그냥 하나로 보인다. 아픈 윤진씨는 걱정되지만 아픈 미흔은 당연한 상황이다. 그냥 쭉 촬영을 계속해나갔다.

2002년 6월22일

드디어 미흔과 인규가 처음 조우하는 장면.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부희집 앞 십자로는 그늘이 하나도 없다. 제작부들은 통제하랴 아이스박스에 얼음과 음료수 채워넣으랴 차가운 물수건 만들어 대랴 정신이 없다. 흡사 태양은 가만히 있다가 슛만 들어가면 구름 안으로 슬쩍 몸을 피하는 것 같다. 영화를 준비하며 촬영감독과 난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권에서 조율되기를 희망했다.

녹색의 풀(벼를 포함해서)과 나무, 그리고 붉은색의 흙이 인물 주위에 뭉개져 있는 듯한 느낌. 빛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빛 안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후회를 해보게 된다. 태양은 매초 조금씩 제멋대로 움직이는 키라이트 같다. 더운 여름의 날에 HMI조명기를 몇대 켜놓은 그 안에서 인규와 미흔이 서로를 경계하듯 지켜보고 있다. 밤에 숙소로 들어와 시꺼멓게 타서 살갗이 벗겨지고 있는 종아리를 재미삼아 긁으며 생각해봤다. 영화촬영이란 끊임없이 자연을 모방하고 사소하게 자연에 굴복한다.

2002년 7월3일

두명의 배우와 각각 미팅을 했다. 미흔과는 별 심각한 이야기 없이 수다만 떨었다. 신문에는 김윤진의 노출에 관한 기사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김윤진 완전노출 그 속사정’ 뭐 이런 기사들. 우린 한번도 노출에 대해 심각해본 적이 없었다. 기사 이야기를 하며 키득키득 서로 웃다가 갑자기 정사신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장을 끝냈다는 것은 연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시작일 뿐 정작 중요한 것은 정사신의 감정과 연기다. 나, 미흔, 인규 모두 정사신 촬영에 대한 경험이 없다. 내일 있을 키스신에 대해 미흔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래도 키스신에 대해선 경험이 있는 티를 낸다. 귀엽기도 하지…. 인규는 아직 자신의 존재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것 같다. 인규는 흔히 볼 수 있는 남자가 아니어야 한다.

삶 속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그냥 제대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 패배자라 인정하고 틀어박혀 있는, 허접하고 궁상스러운, 그러나 모든 촌스러운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 인규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스스로를 남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세상에 화가 난 게 아니다. 그냥 자신한테, 자신이 하도 못나서. 그냥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쓰레기처럼 허비해라. 거기에 나름대로의 미덕이 있다. 종원씨는 이해를 잘한다. 내 예상이 맞았다. 실생활에서 종원씨는 모범가장이다. 부인에게 여전히 존댓말을 하고, 술을 먹다가도 전화를 해서 보고를 한다. 이제 안정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행동하는 사람만이 인생을 허비하며 유희를 즐기는 것의 매력을 이해한다. 그것을 버렸을 때의 아쉬움을 기억하니까.

2002년 7월5일

차로 인규를 쫓아가는 미흔. 비오는 날이어야 하는데 정말 비가 온다. 라마순. 태풍이란다. 빗줄기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조명기를 켰다. 모두들 감전사고에 초긴장. 즈비쉑(카메라 어시스턴트)은 카메라 렌즈가 상할까봐 노심초사. 바닷가 언덕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롱숏을 찍기 위해 바다쪽 방파제 끝으로 나가 촬영을 했다. 프로듀서는 꼭 필요한 인원만 빼놓고 모든 스탭들을 일찌감치 숙소로 들여보냈다. 안전을 위해 나와 촬영감독, 카메라 어시스턴트, 스크립터, 제작부장과 프로듀서만 카메라 위치로 이동했다. 심한 비바람에 차와 카메라와 사람이 모두 흔들린다. 우리를 지켜보던 옆 군부대 군인이 가끔 큰 돌도 날라오고 파도에 쓸려 내려갈 수 있으니 조심하란다. 왜 촬영감독과 나는 이런 경우에 흥분되고 즐거움을 느낄까…. 오늘 촬영은 만족스러웠지만 문제는 태풍이다. 점점 다가온단다. 오늘부터 제작부는 오픈세트 사수에 들어갔다. 초비상 밤샘이다. 나머지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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