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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감독의 <밀애> 제작일지(1)
2002-11-02

감독은 욕망한다,몸의 격정을

“연출일지 어이. 그거 쓸 시간 있으면 연출을 더 잘했어야지.”

변영주 감독은 낯간지러운 짓은 좀처럼 안 한다. 아니, 못한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흔한 일 부탁하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잘못했다간 욕만 드립다 얻어먹기 일쑤다. 연출의 변도 그렇다. 부탁한 지가 수개월 전. <밀애>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음알음 건넨 것인데, 개봉이 임박해서야 ‘거머리 같은 놈. 귀찮아서 해준다’는 식이다. 하긴, 밀고 당기는 데는 그가 ‘선수’ 아닌가.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시작으로 <낮은 목소리1, 2> <숨결>까지, 역사의 망령에 짓눌린 할머니들의 봉해진 입을 저절로 트이게 할 정도였으니.

어쨌든 그가 이번엔 <밀애>를 내놓는다. 극영화로의 첫 진입은 변신이라기보단 연장이다. 절연이라기보다 확장이다. 그의 다큐멘터리가 여성의 몸에 각인된 역사의 폭력성에 대한 진술이었다면, <밀애>는 여성의 몸이 욕망하는 또 다른 일상을 위한 게임이다. ‘진부하지만, 솔직한 통속극’이라는 <밀애>를 내놓기에 앞서, 그가 일지를 내놓는다. 장문의 행간에 알 수 없는 미열이 웅크리고 있음을 느낀다면, 그건 비단 지금 폐렴에 걸려 골골대는 그의 입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편집자

<밀애>를 만들겠다고 처음 결심했던 때가 정확히 몇년 몇월 며칠인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며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날의 날짜나 때가 단 한 가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장산곶매에서 처음 선배들과 만나기 시작했던 날, <낮은 목소리>의 할머니들을, 강덕경 할머니를 처음 만난 날, 이제 극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던 날이 정말 정확히 언제였지 아… 부모의 생일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장산곶매의 흑석동 쪽방 사무실에선 항상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당시 한구석에 폐인처럼 부스스 앉아 있던 어떤 이가 영화 이야기에서는 얼마나 반짝거렸는지를, 강덕경 할머니의 방엔 항상 꽃이 있었고, 그 꽃 옆에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부엌 한구석에서 소주잔을 기울이시던 박두리 할머니처럼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이 글은 아마 그런 글이 될 것 같다. 제작부서의 파일함에 정리된 촬영일정표를 들추어보면 하루하루 기록되어 있는 그 ‘날’들 외엔 어떤 날도 자신의 날과 때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저 내 마음속에 각인된 어떤 감정들의 나열인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그런 글을, 연출일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이다지도 영화주간지들은 개봉영화의 연출일지를 잡지에 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일까… 어디나… 현장은 지옥에서 보낸 한철 같은 매혹이 있을 뿐일 텐데….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만나다

소영 언니(김소영 교수)를 만나러 영상원엘 놀러갔다. <낮은 목소리2>인지 혹은 <숨결>인지에 대해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언니가 문득 전경린의 신간소설을 읽어봤냐고 물었다. 제목을 묻자 조금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긴 제목을 말해주었다. 여성의 욕망에 대한, 참으로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점인지 책 대여점인지에 들러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두 시간 만에 다 읽어버리고는 아마도 술을 마시러 갔으리라.

일본, 야마가타, 1999년

<숨결>의 상영으로 야마가타영화제를 찾다.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다. 이곳에서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서 <숨결>까지 내 모든 다큐멘터리영화가 상영되었다. <낮은 목소리2> 때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두들 더욱 반겨준다. 메인 상영관 뒷골목의 냄비우동집 아주머니도 그대로 맑게 웃어주지만 난 별로 즐겁지 않다. 백내장에 걸린 내 눈. 8년간 다큐멘터리를 하며 내 스스로 카메라를 잡고 대화를 해나가는 방식에 대해 겨우 이제야 하나를 알아버렸는데 <숨결>을 찍고는 그냥 끝이다. 카메라 포커스를 제대로 맞출 수가 없다. 뭘 해야 하나. 일단 단골이 된 술집으로 가 즉석 유바(두유껍질)와 데운 청주를 마시고 잠이 들었다.

<도쿄 엘레지>, 너 좀 쉬고 있어. 2000년 아마도 여름

다음 영화는 어떤 걸 할까 고민을 시작한 지도 꽤 되었던 어느 날. <낮은 목소리2> 때부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도쿄 엘레지’프로젝트를 다시 꺼내보았다. 아마도 내가 하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 있는 작품인 거 같다. 시대, 인물, 스토리, 주제….

서랍 속에 넣어두고 새로운 작품을 고민하기로 결심하다. 매혹적이고 사랑스럽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마도… 극영화 2000년 가을

마술피리의 오기민 선배와 함께 작업을 하기로 했다. <유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 적어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라는 것은 확실히 정해진 것 같다. 한 걸음은 걸은 듯하다. 자꾸만 머리 속에 어른 여자와 아이 여자가 함께 조그만 산길을 걸어가는 것이 꿈에 보였던 것이 이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한 유일한 이유이다. 한편 그 옆에선 <낮은 목소리>에서 <숨결>까지 프로듀서를 했던 신혜은이 이미 지난봄에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판권을 해결하고 각색자까지 두고선 작업을 하고 있다. 6개월 전 나에게 연출을 해보자고 제안을 했지만 거절했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미흔이 나에겐 너무도 멀리 있는 존재 같았고, 원작소설이 있는 작품으로 첫 영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기민이 형 말대로 신혜은이랑 충무로에 와서도 또 작품을 처음부터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마지막 말에는 신혜은도 동의하는 듯해서 솔직히… 섭섭했다. 그래, 너 한번 나보다 좋은 감독 만나봐라.

2001년 봄

큰일이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주인공도 내용도 너무 다르지만… 유괴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사유의 과정이 너무나 동일하다. 게다가 ‘이 세상엔 착한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어’라는 표현은 정말 정확히 일치한다.

2001년 여름

<씨네21> 김혜리 기자에게 <유괴>에 대해 세 시간 동안 마구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고(그냥 가라고 한다고 술 취한 사람 놔두고 가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리고 일주일 뒤. <씨네21>에 실린 <유괴> 프로젝트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유괴>에서 손을 떼고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연출을 맡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신혜은과 소영 언니의 진심어린() 지지가 나의 마음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어찌됐건 김혜리 기자에겐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시침을 떼기로 결심했고 잘못된(!) 내용을 기사화한 <씨네21> 기자를 보며… 이 땅의 언론에 대해 다시 한번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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