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변영주 감독의 <밀애> 제작일지(2)
2002-11-02

감독은 욕망한다,몸의 격정을

2001년 늦여름

여름의 남해가 너무 싫다고 생각하며 8월을 보냈다. 전경린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고 아마도 원작의 배경이 되었을 경상남도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나는 끔찍하게 습하고 더운 날씨에게 이미 흰 기를 날리기 시작했고, 내가 근처도 가기 싫어하는 굴 양식장은 경남의 바닷가 마을 이곳저곳에 깔려 있다. 심지어 돌담 대신 굴껍질을 이용해 담을 쌓은 곳도 있다. 늦가을로 크랭크인이 잡혀 있는 게 왜 이리도 기쁜지 모르겠다. 기민이 형이 기민하게(!) 움직인 대로 남해군에서 영화에 관심을 갖는다. 명계남 선배의 도움이 컸다. 정말 발도 넓지…. 군청에서 소개해준 분과 함께 영화의 배경이 될 ‘나비마을’의 후보지를 찾아나섰다. 몇번의 헌팅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조그만 마을들이 속속 발견된다. 그리고 한 마을을 보았다.

2001년 가을

이근아 미술감독은 영화의 공간들과 캐릭터의 의상 컨셉에 대해 이것저것 스케치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권혁준 촬영감독과의 1차 콘티작업이 진행 중이다. 헌팅에 참여하고 조명디자인 논의를 하기 위해 폴란드에서 개퍼 야누시가 왔다. 친절하고 꼼꼼한 사람이다. 연출부들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신혜은도 제작부와 함께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내 머리 속은 비어 있다. 난… 잘 모르겠다. 공간과 빛 속에 인물이 들어오지 않는 한 그 모든 상상은 의미가 없다. 시나리오 속 미흔의 현실적 실체를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 어쩌면 나는 시나리오의 캐릭터에게서 감정과 내러티브만을 가져오고 나머진 그 역을 맡을 배우의 이미지와 실제 생활습관 속에서 찾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매일매일 말 없이 열나게 시나리오를 제본(훌륭한 가내수공업으로!)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뛰쳐나가는 프로듀서, 역시 바쁜 걸음으로 성북동 고갯길을 묵묵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제작자. 이 두 사람은 가끔씩 2층 사무실 방문을 닫아놓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배우 이야기일 텐데…. 청담동 카페에 앉아 매니저들에게 시나리오를 주며 내 영화를 설명하는 후줄근한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혜은이 김윤진씨를 거론했다. 성북동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참 좋았다. 정말로….

2001∼2002년 겨울

끝내 크랭크인은 연기되었다. 남자배우가 결정이 되지 않았다. 쉽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인 인규는 내러티브를 이끌고 가지 않는다. 대신 무척이나 집중된 감성이 필요하다. 겉으로 보기에 양은 적고 내용은 어려워 보이니까. 윤진씨쪽은 기다려준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일정이 늦어지고 있는 <예스터데이>가 고마울 뿐이다.

2002년 봄

영화를 뒤로 미룰지 어떻게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끔찍한 며칠이 계속되었다. 밤이고 낮이고 사람들을 만나러 뛰어다니는 혜은이. 거의 매일 아침 6시가 되어야 집에 들어오고 또다시 9시면 나간다. 할말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묵묵히 지내는 와중이지만, 촬영감독, 미술감독과 미술팀, 제작실장을 비롯한 모든 제작부, 그리고 연출부들 모두가 이 작품과 함께 끝까지 가겠다고 한다. 신혜은과 난 인복이 있다. 모두들 고맙다. 그리고 어느 날. 좋은영화의 김미희 대표와 만났다. 며칠 뒤, 제작부 막내를 포함한 모든 스탭들의 출근 장소가 바뀌었다. 충무로로.

2002년 역시 봄

윤진씨와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남자배우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불안해하지 않는다. 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 윤진씨는 미흔의 아픔을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삶 속에서의 상처들을 다시 돋아내야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좋은 태도. 참 이쁜 배우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남해의 조그만 마을에선 세트 부지로 결정된 묵답 5층을 깎아내고 콘크리트를 덮고 미흔과 인규의 집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고 폴란드에서 조명팀과 카메라 어시스턴트, 그리고 달리맨이 왔다. 촬영을 위한 최종조율이 시작되었다.

2002년 여름 같던 늦봄

드디어 인규 역의 배우가 결정되었다. 재밌는 캐스팅인 것 같다. 종원씨는 오랫동안 드라마에서 어떤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우리 영화의 캐릭터의 정반대에 서 있다. 출연을 결정한 다음날 종원씨가 영화사 사무실에 들어왔다. 만져서 귀퉁이가 시꺼메진 시나리오를 나에게 내밀며 대뜸 인규에 대해 자기 생각을 마구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오늘 종원씨 얼굴을 보며 인규의 이미지를 세개 이상은 건진 것 같다. 그리고 촬영에 관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아니 끝냈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제목도 결정했다. 난 길긴 하지만 원작과 같은 제목으로 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Daum의 원작소설 팬카페에 들어가보니 심지어 그곳에서도 제목을 제대로 쓴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순간 제목의 변경을 새삼 결심했다. <밀애>. 내 첫 극영화의 제목이다. <밀애>로 결정하는 순간, 아마도 나중에 에로비디오쪽에서 이 영화의 패러디 제목을 짓는다면 <때…밀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를 5분간 한심해 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