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컬처잼 > e-윈도우
뿔난 소년과 새장에 갇힌 소녀,<이코>
2002-11-07

컴퓨터 게임

롤플레잉 게임 주인공이라면 고생할 팔자는 타고 났다. 어떻게 된 일이지 들르는 마을마다 문제가 있고, 그곳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해결해보려는 생각은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다. 숲에 놀러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구해오고, 유령이 나오는 집에 가 하룻밤 지새우며 원혼을 달래주고, 다음 마을로 가는 유일한 길인 끊어진 다리를 이어주고, 가끔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큐피드 역할까지 해준다. 롤플레잉 게임을 ‘심부름 게임’이라고도 부르는 건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만은 아니다. 그 많은 주인공들 중 제일 고생하는 게 이코다.

이코는 산골 소년이다. 못 먹어서 그런지 작은 키에 햇볕에 그을은 깡마른 팔다리의 이코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에 뿔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뿔이 난 아이가 태어나면 바다 위에 솟은 성에 제물로 바쳐지게 되어 있다. 열세살 생일날 이코는 우리에 갇혀 성으로 끌려갔다. 도망치려는 생각은 하지 않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코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던 시절부터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이코는 산 채로 작은 상자에 넣어졌고, 수많은 다른 상자들 옆에 나란히 세워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지진으로 이코가 들어 있는 상자가 받침대에서 굴러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이코는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그렇게 영원히 갇혀 있었을 것이다. 자유의 몸이 된 이코는 성 안을 헤매다가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소녀를 만난다. 하얀 피부에 부드러운 손을 가진 요르다 같은 아이는 마을에서 본 적이 없다. 검은 그림자로부터 요르다를 구해낸 이코는 말도 통하지 않는 소녀를 데리고 성을 빠져나가기로 마음먹는다.

쉬운 일은 아니다.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유난히 튼튼한 이코는 웬만한 곳에서 떨어져도 그냥 엉덩방아를 찧는 걸로 끝날 뿐이다. 자기 키보다도 높이 뛰어오를 수 있고, 낭떠러지도 겁내지 않는데다가 밧줄만 있으면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갈 수 있다. 날렵한 이코의 움직임은 사내아이라기보다는 새끼원숭이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요르다는 다르다. 조금만 높아도, 조금만 위험해도 고개를 흔들며 오려 하지 않는다. 요르다를 데려가기 위해서는 이코 혼자 낭떠러지를 뛰어넘고 벽을 타고 건너가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고나서 목청이 터져라 부르면 간신히 느릿느릿 걸어온다. 혼자 떨어져 바쁘게 움직이다보면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다. 요르다의 비명소리가 들리면 이코는 달린다. 벽을 기어오르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요르다에게로 돌아가 나무 막대기 하나로 그림자와 맞선다.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소녀를 모른 척했다면, 그림자에게 납치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제물이 되는 스스로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던 때에는 이렇게 불안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코는 후회하지 않는다. 당나귀에 실려 성으로 끌려올 때도, 좁은 상자에 갇혀 혼자 남겨졌을 때도 겁내지 않던 이코지만, 요르다와 헤어지는 것은 너무 무섭다. 발판을 만들기 위해 무거운 상자를 옮기면서도 쉬지 않는다. 한발만 헛디디면 바다로 떨어져버리는 철로도 단숨에 뛰어서 건너간다. 떨어져 있는 순간이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험한 곳도 괜찮다. 힘들어도 상관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요르다를 데려와 함께 있고 싶다. 퇴락한 성을 덮고 있는 안개 속에서 두 아이가 달린다. 손을 잡으면 요르다의 심장 고동이 느껴진다. 손을 놓지 않고 뛰다보면 틀림없이 이 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애써 생각한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