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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식스틴> Sweet Sixteen - 전찬일 영화 평론가
2002-11-21

삶이여, 투쟁이여

<스위트 식스틴> Sweet Sixteen

영국, 2002년, 106분

켄 로치, 오후5시 시민회관

우회적으로 시작하련다. 내 생애 평생 잊지 못할 ‘이상한’ 영화보기 체험으로부터.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혼과 하루>가 황금종려상을 가져간 지난 1998년 제 51회 칸 영화제에서, 경쟁작 <내 이름은 조>를 볼 때였다. 분명히 영어 같긴 한데 등장인물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유인즉, 표준 영어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식 영어인 탓이었다. 불어 자막이 나오긴 했지만,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처음엔.

당황은 그러나 이내 내게서 멀어져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가 머리와 동시에 가슴에 호소해서였다. 그래, 그래서였다.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으나 인물들의 대사를,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따라가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낄 수 없을 뿐 아니라 커다란 감동마저 만끽할 수 있었던 건. 놀라운 사실은 켄 로치가 관객들의 감정에 의존하는 감성적 감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냉정하리만치 이성적이고 목적적이며 다분히 선동적·교조적으로 비치기까지 하는 이성적 감독인데도 우리들의 가슴에 깊고 진한 울림을 안겨준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건대 <내 이름은 조>의 그 경이적 체험은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피터 뮬란- 부산에도 초청된 <막달레나 자매들>로 올 59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은 바로 그 감독이다-의 열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없이 자기를 낮추고 그 어떤 과장과 기교도 배제한 채, 인물들의 삶을 응시하는 감독의 정직한 시선과 진정성 넘치는 태도 때문이었다. 내가 켄 로치를 거장으로서 진정 존경하는 결정적 이유이다. 현존하는 제일 명망있는 좌파 사회주의자 감독이어서가 아니라 말이다.

맹목성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그 누구보다 <랜드 앤 프리덤>(95)에 열광하고 <레이닝 스톤>(93)에 감동한 것도, 여러 모로 아쉬운 <칼라 송>(96)에도 별로 실망하지 않은 것도 실은 그 거장을 향한 그 끝없는 존경심에서였다. 2000년 칸에서 <빵과 장미>를 볼 때도, 그리고 올해 칸에서 이 영화 ‘스위트 식스틴’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올 칸에서 접한 40편 가량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스위트 식스틴>은 내 생애 최고의 성장 영화로도 머물 성 싶다.

각본상 수상이 말해주듯,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무대로 살아남기 위해 서서히 범죄 세계로 빠져드는 열여섯 리엄(마틴 컴스턴)의 삶을 추적하는 플롯에는 흔치 않은 보편적 설득력이 살아 숨쉰다. 비록 수상엔 실패했지만 마틴은 남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거론될 만큼의 열연을 펼친다. <스위트 식스틴>은 그러나 예술로서 영화를 향한 취향 및 지향이 사치일 수도 있다는 일종의 교훈 내지 각성을 ‘불현듯’ 안겨준다. 켄 로치에게 영화는 예술 이전에 삶이요 삶의 투쟁의 장인 것이다. 리엄에게 삶은 생존 투쟁인 것처럼….

전찬일/ 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