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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1천원,맛은 문제없어 <빈민의 식탁>
2002-11-28

만화 ·애니

연말이 되면 각종 순위 발표와 시상식이 이어진다. 믿을 만한 통계가 없기로 유명한 만화쪽에서도 나름대로 행사들이 이어질 것으로 보이고, 최근에는 네티즌을 중심으로 ‘독자들이 뽑는 만화 대상’ 같은 행사도 준비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어떤 작품이 인기가 있었는지도 궁금하긴 하지만, 어떤 소재의 작품들이 인기가 있었는지 좀더 관심이 간다. 올 한해 국내에서 출간된 만화들을 소재별로 나누어 집계하면 과연 어떤 소재들이 상위권을 점하고 있을까 여기에 약간 도박의 요소를 가미해 추측해보자. 만약 복승식으로 베팅해보라면 어떤 소재들에 돈을 걸어볼 것인가 나는 일단 한 자리를 메우고 생각해보겠다. 두 번째 써넣을 것이 야구만화인지, 해적만화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첫 번째는 ‘요리’다.

못 말리는 백수 아빠

<맛의 달인> <아빠는 요리사> <미스터 초밥왕> 등이 몰고온 요리만화 열풍은 어느 정도 잠잠해진 듯하지만, 그래도 요리 소재의 만화는 쉴새없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양이 많아질수록 점점 독자들을 식상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만화 속에서 소개되는 화려한 미사여구의 맛들을 어찌 다 확인해볼 것이며, 또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할 돈은 얼마나 될 것인가 정말로 미식가의 길은 ‘멀고도 돈 든다’는 사실만 확인해야 할까 재벌 씹기, 연예인 흉보기처럼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며 투덜대는 것도 나름대로 현대인의 엔터테인먼트로 자리잡았다지만, 그래도 따라해보는 재미를 모르는 바가 아닌데 가난한 만화 독자들은 언제까지나 군침만 흘리고 있어야 하나 뭔가 없냐고 좋다. 여기 <빈민의 식탁>을 맛보지 않으시려나 제목부터 뭔가 끌어당기는 게 있지 않나 1인분에 100엔 이하, 궁핍의 재료로 최고의 맛을 내보겠다는 야심찬 테마의 요리만화다.

세상은 불황이다 어쩐다 떠들어대지만 만사 태평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부터 파친코 장을 전전하는 남자가 있다. 젊고 예쁜 아내가 2년 전에 죽은 뒤, 혼자서 중학생인 딸과 초등학생인 아들을 키워야 하지만 취직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라는 백수 건달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래도 자신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에게는 돈도 미래도 없어 보이지만, 넘치는 시간과 훌륭한 요리 솜씨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 돈 100엔은 환율로 계산하면 우리 돈 1천원 정도. 실제 물가를 따져보면 그보다 더 아래가 되겠지만, 이 만화에서 그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의 목록은 상당하다. 참치비빔초밥, 감자카레볶음 정도는 그럭저럭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리버(소의 간)가스, 몸 짧은 장어 덮밥, 실크로드풍 대구 칠리 토마토 등의 그럴싸한 요리도 이 남자의 손에서 뚝딱하고 만들어져 상에 오른다. 매편 만화가가 직접 출연하여 재료비와 레시피를 공개하는 것을 보아도, 그냥 입에 발린 소리로 독자들을 쌈싸먹으려는 것은 아닌 듯하다.

물론 요리만화라는 게 ‘실용성’이라는 점이 상당히 중요하지만, 이 만화를 새삼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다. 왠지 무능력하고 파렴치하게까지 보이는 아빠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입맛을 생각하는 정성은 대단하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딴 건 없어도 ‘시간’은 충분하다는 백수로서의 훌륭한 자각이 깔려 있다. 현실파인 딸 치나츠도 아빠를 ‘못 말리는 아저씨’라며 구박하지만, 그래도 아빠의 공들인 요리에는 탄복하고 만다. “아빠, 정말 어쩔 수 없는 백수지만, 추억을 만들 시간만은 썩을 정도로 많아”와 같은 자학적인 대사도 시큼한 유머를 주기에 충분하다.

가족 사랑은 식탁 위에

워낙 놀고먹는 생활이라 스트레스 지수는 제로에 육박, 그래서 딸의 바가지와 히스테리도 언제나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아빠의 모습은 물론 만화 속에서 이상화되어 있다. 만화가도 가스 공급 중단 등 적당한 긴장감은 주지만 극단적인 위기는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래도 굳이 그 현실성을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고도 성장으로 이루어진 현대사회는 빈부격차도 극심하게 만들어냈지만, 복지사회라는 이름 아래 백수들이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도 만들어놨다. 그 틈 속에 들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연봉 1억원의 고소득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행복이라는 최종의 점수를 따기 위해 시간을 소모해 돈을 얻을 것인가, 돈을 버리고 시간을 얻을 것인가 왠지 후자가 쉬워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일단 전자쪽으로 달려든다. 아빠 술값을 쪼개 애들 과외를 시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류대에 보내려 한다. 왜냐면 자존감(pride)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 빠듯한 공동체가 끊임없이 서로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빈민의 식탁>은 그 자존감을 ‘먹는 즐거움’에서 찾는다. 행복한 밥상 앞의 웃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 만족으로 다른 모든 궁핍을 덮어버린다. 그것은 위로는 부처가 찾는 해탈의 경지, 반대로는 동물들이 느끼는 안이한 만족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철학의 최종적인 완성은 욕망에는 충실, 모멸에는 무지, 아빠라면 뭐든 OK인 아들 하지메에게서 이루어진다. 녀석은 짱구보다 10배쯤 강해 보인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