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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필수 아닌 선택?
2002-12-04

김선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을 보고 싶지만 안 보기로 작정했다. 장동건 때문이다. 텔레비전 광고에 나와 장동건이 씩 웃을 때마다 허약체질이라 군대 안 갔다는 소문이 생각나서 남들은 군대가서 썩는 동안 돈 벌고 인기끌고 좋겠다며 채널을 돌려버린다. 아들을 전방으로 보내고나서 병역면제자에 대한 분노가 이성을 잃고 있는 수준인 것 같아 자제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남자배우나 가수를 평가할 때 군대에 다녀왔냐 안 다녀왔나가 기준이 되고,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을 군대 갔다온 사람과 안 갔다온 사람으로 구분하는가 하면, 친지나 동창생 동료들에게 아들을 군대에 보냈는지 은근히 물어본 연후에 군대를 안 보냈으면 등을 돌리게 되니 중증도 심한 중증인 것 같다.

까라면 무조건 까고, 기라면 군소리 없이 기고, 영장 나오면 툭툭 털고 군대에 가는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전날까지 철책근무는 너무 싫어 카투사로 갈까 의경으로 갈까 버팅기는 아들을 등 떠밀어 군대에 보냈다. 사흘이 지나 인터넷사이트를 뒤져보니 아들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의 원통에 있는 전방부대로 떨어졌다. 철책근무 7~8개월은 필수라는 곳이다. 2주일만 지나면 편지가 온다더니 스무날이 지나도록 소식도 없고 군사기밀이라 주소도 나와 있지 않아 편지도 못 보냈다. 열흘쯤 지나 입고 간 옷을 담은 소포가 왔는데 웃도리 아랫도리 할 것 없이 주머니가 열댓개 되는데 구석구석 샅샅이 찾아보아도 쪽지 한장 나오지 않았다. 잽싼 놈들은 그 와중에도 한자 써서 집어넣는다던데 매사에 느릿느릿한 성격이 군대밥 사흘에 변할 수는 없지 하며 쓸쓸해졌다.

한 여론조사에서 고교생들의 34%만이 군대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했고 54.3%는 능력에 따라 갈수도 안 갈수도 있다고 답했다. 병역이 의무가 아니고 선택이고 능력이라니 죽어도 가야 한다고 아들들에게 누누이 강조해온 것이 무색해진다. 아마도 지난 몇년 동안 고위층이나 특권층들의 병역면제가 흔한 것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능력‘으로 간주될 뿐 아니라 출세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병역면제는 더이상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의 대상으로 변질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것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두 아들이 병역면제를 받았는데도 아버지가 여전히 대통령 후보로 건재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5년 전 대선 때 이회창 후보는 소록도로 아들을 보내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했다. 소록도로 떠날 때 많은 부모들이 동정심을 보였다. 그런데 대통령선거에서 떨어지고 몇달 안 되어 소록도에서 나와 이곳저곳에서 경력을 쌓고 하와이에서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국민들은 배반감을 느꼈다. 5년 뒤 대통령 선거에 다시 나올 거라면 군대면제가 아무리 정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몇년 동안의 봉사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병역의무가 국민의 의무인 나라의 대통령 후보로서 떳떳한 자세였을 것이다. 아들들은 군대 때문에 인생 꼬인다고 푸념하고, 부모들은 자녀를 군대에 보내놓고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법에 따라 군대에 안 갔으니까 꿀릴 것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결코 ‘대쪽‘이나 ‘법대로‘ 정신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후보의 두 아들이 인생에서의 많은 계획들을 잠시 유보하고 지난 5년 동안 병역의무기간만큼씩 소록도건 어디에서건 봉사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지금의 대선국면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김선주/ <한겨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