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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 베커 감독의 <머큐리>
2002-12-04

아이가 비밀을 알고 있다

Mercury Rising, 1998년감독 해롤드 베커 출연 브루스 윌리스KBS2 12월7일(토) 밤 10시50분

아이는 정상이 아니다. 타인과 대화를 나누기 힘들 정도로 언어능력이 부족하고 대인관계에 서툴다. 학교도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다닐 수 없다. 흔한 용어로 자폐아다. 그런데 아이에겐 비범한 능력이 있다. 헝클어진 숫자와 도형, 그리고 기호의 배치 속에 숨겨진 어떤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자폐 성향의 캐릭터라면 우리는 더스틴 호프먼이 출연한 <레인맨>(1988)을 떠올릴 수 있다. <레인맨>이 가족의 복구라는 단순한 목표를 향해 걸어간다면, <머큐리>는 좀더 복잡하다. 음모론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어느 남자, 그리고 살인극이 뒤죽박죽 뒤섞인다. 자폐아는 태풍의 눈, 한가운데 서 있다.

아이의 이름은 사이먼이다. 자폐아 사이먼은 퍼즐잡지에 실린 암호를 해독하고 무심결에 전화를 건다. 아이가 풀어낸 암호는 일명 ‘머큐리’라고 불리는 것으로 국가보안 암호제조기로 만든 것. 개발요원이 장난삼아 퍼즐잡지에 실어놓은 것인데 이것을 푼 사람은 사이먼이 처음이다. 암호와 관련된 이들은 책임자 니콜라스 커드로에게 사실을 알린다. 상부에선 사이먼을 살해할 것을 명하고 FBI 요원 아트가 사이먼을 보호하게 된다. 아트는 왜 사이먼의 부모가 살해당하고 사이먼마저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지 영문을 모르는 상태다.

<머큐리>는 전형적인 장르영화다. 이 영화는 스릴러와 미스터리의 공식 몇 가지를 조합해서 만든 결과다. 무력한 아이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그를 보호할 임무를 지닌 사람은 아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알지 못한다. 거대 관료조직은 하찮은 이유 때문에 아이를 제거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여기에 암살자가 급파된다. 암살의 임무를 맡은 이는 또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내지 못한다. 영화는 액션장면을 군데군데 배치하면서 관객의 시선을 끝까지 붙들어놓으려고 애쓴다. 해롤드 베커 감독은 다양한 장르물을 만든 적 있다. <생도의 분노>(1981)에서 <맬리스>와 <씨티홀>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스타급 출연자를 기용하면서 장르물을 익숙하게 변주하는 기술을 보여줬다. <머큐리> 역시 다르지 않다. 해롤드 베커 감독은 남성 캐릭터를 세심하게 빚어내는 것에 발군의 솜씨를 보여주곤 한다. 심리적 내상을 간직한 브루스 윌리스가 자폐아 소년과 우정을 쌓는 과정을 노련하게 담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좀 지루하다. 플롯들은 꽉 짜여진 기분이 덜하고 스릴러영화치곤 ‘아직 뭔가 궁금한데’라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쾌감도 덜하다. 어느 외지에선 “다음엔 암호가 해석되면 아이를 죽이는 대신, 암호개발자를 죽여라”라며 비아냥거렸는데 그냥 웃어넘기기엔 정곡을 찌른 언급이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해롤드 베커 감독작 중에선 알 파치노가 주연했던 <사랑의 파도>(1989)가, 아직까지는 최고작 아닌가 싶다.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