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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힘 vs 인간의 욕망
2001-04-19

컴퓨터 게임 | <블랙 앤 화이트>

가끔 힘을 갖고 싶을 때가 있다. 버스 운전사가 맹도견을 태우는 걸 욕설을 섞어가며 한사코 거부할 때, 지하철에서 엉덩이를 더듬던 추한 손의 주인이 적반하장으로 폭력을 휘두를 때, 국회의원들이 공항 귀빈실을 차지하기 위해 국민의 대표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일 때, 나는 권력을 원한다. 내가 절대자가 된다면 세상을 이렇게 놔두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신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블랙 앤 화이트>는 ‘신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새로 나온 시뮬레이션이란 얘기가 아니라 신이 되는 게임이다.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는 신이 없었다. 하지만 신이 필요없을 만큼 순수했던 시대는 사람들이 ‘소원’이란 걸 가지게 되면서 끝을 맺었다. 원하는 것이 생기게 된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신으로서 게임 속에 소환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걸 모두 들어줄 필요는 없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나뿐이다.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고, 내가 조종하는 ‘크리처’를 통해 사람들을 도와줄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이 세계는 말 그대로 내 손끝 하나에 달려 있다. 내 의지를 가로막는 장벽은 없다. 그런데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생각보다는 별로 즐거운 경험이 아니다.

곡물을 좀더 많이 생산할 수 있도록 기후도 관리하고, 수확철에는 크리처를 시켜 직접 일을 돕게도 한다. 당연히 감사를 받을 줄 알았는데, 뭐가 불만인지 다른 세계로 가겠다는 녀석이 나온다. 신 체면에 이 상황에서 밴댕이속이 될 수는 없다. ‘좋다. 도전정신은 인간이 가져야할 기본적 덕목이지.’ 그런데 이 녀석들이 그냥 안 떠나고 염치없이 뭘 달라고 한다. ‘배를 만들어야겠는데 나무가 없네. 나무 좀 주면 좋을 텐데.’ 듣고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마을에 있는 목재 보관소에서 나무를 갖다 준다. ‘나무가 모자라네, 더 주면 좋을 텐데.’ 이왕 밀어주기로 한 거 좀더 가져다준다. ‘배만 있으면 뭐 하나, 바다에서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목재도 가져다주는데 곡물을 못 줄 건 없다. ‘곡물만 먹고 살 수 있나, 맛있는 것도 먹고 싶은데, 고기 좀 주지.’

신이 할 수 있는 기술 중에 거대한 바위를 집어던지는 게 있다. 원래는 다른 종족과의 전쟁이나 마을개발에 써야겠지만 뻔뻔하게 ‘고기 좀 주지’라는 노래를 듣고서 이 기술을 쓰지 않기는 어렵다.

신이란 특이한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사람들이 지닌 소망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다. 모든 욕망은 또다른 욕망을 낳는다. 그리고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다면 뭐든지 한다. 툭 하면 크리처를 보내서 마을사람들을 집어던지고 가끔 잡아먹는 신이라도 상관없다. 그 사악한 모습조차도 자신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는 힘의 징표로밖에 안 느껴진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비로운 신이 아니라 강한 신이다. 그리고 그 힘이 더 강력해져서 자신이 믿는 신을 통해 자신들의 힘도 좀더 넓은 세계로 퍼져나가길 원한다.

게임 속에서가 아니라 진짜 신이 되더라도 세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권력이라도 사람들의 욕망을 이길 도리는 없다. 욕망을 가로막는 신 따위는 금방 퇴출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욕망 따위야 어떻게든 찍어누르더라도, 결정적으로 내 자신의 욕망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박상우 | 게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