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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지아장커를 만나다 <5>
2002-12-07

˝5세대의 배신을 넘어, 지하전영은 전진한다˝

1995년의 중국, 2002년의 중국

정성일: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소무>의 1995년 중국과 <임소요>의 2002년 중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지아장커: 가장 큰 차이는, 1995년에는 사람들이 현대화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임소요>에 들어와서는 그런 기대와 희망은 이미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소무>에는 현실적인 고민이 있고, 중국 안에서 산다는 것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2002년 중국을 산다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잘산다고 말하는데 실제 삶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소무> 안에 TV에서 나오는 내용은 거의 다 중국 지역,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임소요>에 나오는 것들은 현대사회의 부호 같은 소식들만 전합니다.

더 추상적인 듯한 내용들이고 실제로 내 생활과 관계없는 내용들, WTO 가입이 이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베이징올림픽 개최가 이 소년소녀들과 무슨 상관입니까.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담론이 이 사람들의 생활, 실제 생활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지구는 부호입니다. 인터넷도, 인공위성도 중국의 변방의 소년소녀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무>가 물과 모래가 같이 혼재 되어 있는 것이라면 <임소요>의 경우에는 물이 위에 떠 있고 모래가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성일: 2년 전에 인터뷰를 했었을 때, <플랫폼>의 마지막 장면은 희망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임소요>의 마지막 장면은 절망입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은 중국의 상황입니까, 당신의 시선의 변화입니까

지아장커: <임소요>의 결말부분은 특히 비관적인데,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느낌, 개인적인 심리상태를 드러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실제로 어떠한 가능성이, 어떠한 일이 과연 중국의 현재를 바꿀 수 있는가를 전혀 못 느끼겠습니다. 그런 비관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상황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는 것이죠. 그러나 다음 영화가 또 다른 것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생활에 대한 한 사람의 생각은 매번 변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있다면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심리적으로 힘들다고 느꼈던 것을 한순간에 극복해 내기도 합니다. 항상 사람들은 직접 몸으로 이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느끼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무언가 변화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한 세대에 거쳐서 노력을 거친 게 아니라 몇 세대를 거쳐서 기나긴 시간을 통해야만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보면 이러한 과정 중에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가 바로 변화하고 있는 바로 그 과정입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지금은 무슨 일을 할 때 아주 평온한, 평정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원하는 일이 당장 그 결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또다시 희망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점점.

정성일: 지금 준비 중인 다큐멘터리 다음에 찍을 다음 극영화는 어떤 내용이며 언제쯤 촬영을 시작하게 될 것 같습니까

지아장커: 원래는 내년 설 이전에 극영화를 하나 만들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유릭와이가 후반작업을 하느라고 바쁩니다. 그게 바로 나의 사촌동생에 관련된, 탄광에서 일하는, <플랫폼>에 나왔던 그 광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못 찍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내가 무척 좋아하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년 가을에 찍게 될 것입니다.

정성일: 그 영화도 디지털로 찍게 될까요

지아장커: 슈퍼 35mm로 찍으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슈퍼 35mm로 찍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슈퍼 35mm로 찍어 가지고 필름이 국경선을 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직 결정을 안 했는데, HD로 찍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슈퍼 35mm로 찍고 싶습니다. 결국에는 슈퍼 35mm로 찍게 되지 않을까요. (웃음)

정성 일: 허우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를 혹시 봤는지요

지아장커: 봤습니다.

정성일: 당신 자신도 그렇게 얘기를 했고, 당신 세대들도 다들 이구동성으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화어권 영화 전체의 일종의 좌표처럼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밀레니엄 맘보>를 보면 허우샤오시엔의 영화가 완전히 변해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변해버린 허우샤오시엔을 바라보는 당신이나, 당신들 세대의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지아장커: 저같은 경우에는 허우샤오시엔 작품의 변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감독이 우리가 원하는 영화만을 찍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밀레니엄 맘보>는 사실 허우샤오시엔 작품 중에서 그렇게 좋은 작품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작품이 감독의 변화하는 전환기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밀레니엄 맘보>를 통해서 허우샤오시엔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 그것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과정들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허우샤오시엔 자신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다음의 영화가 될 수도 있구요.

정성일: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런 동시대의 흐름 속에서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테마 의식은 무엇입니까 또는 당신 영화 속에서 절대 이것만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아장커: 진실한 본토의 경험, 중국에서의 내가 보는 그 사실적인 경험. 이러한 경험들을 가장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토의 기본적인 토양을 벗어나면 창조력의 그 힘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문화적인 귀속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의 영화도 그런 귀속감이 있는 영화 중의 하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도 한 사람의 중국의 배운 사람, 인텔리로서, 영화 이외에 어떤 책임감도 많이 느낍니다. 난 요즘 최근에 중국에서 이 책임이라는 말을 갈수록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갈수록 중국에서 이 책임감이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피하고 싶지만 결국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최근 2년 동안 생각한 게 나의 이 지하전영 방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최근에 중국 지하전영에서 출발한 감독들이 지하전영을 스스로 비판하는 것에서 대단히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장위안은 지하전영 감독에서 이제는 정부의 공식영화 성격을 강하게 가진 감독으로 변절했는데, 앞으로 나는 나만의 지하전영 방식을 끝까지 지켜나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장위안의 선택을 비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이니까.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면 모든 사람들은 또 그 문제에 부딪혀서 해결을 해야 합니다. 지하전영의 대표적인 감독 중 한 사람인 장위안이 제작방식을 바꾸니까 중국의 영화관리국에서도 아, 지하전영을 하는 애들도 바뀔 수 있겠구나, 그래서 더 엄격하게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얻었던 한계가 있는 공간과 자유가 이제는 더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리가 아닙니까 만약에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지금 이 예술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오늘날 중국의 지하전영에서는 무책임하고, 때로는 이용하고, 감시당하고, 자기의 원칙을 버리고 타협하는 명분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 영화를 만든다는 것, 책임을 진다는 것은 정신을 무척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정성일: 긴 시간 인터뷰에 감사하고, 그리고 다음 영화를 좀더 빨리 봤으면 좋겠고, 그리고 인터뷰는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영화까지 미뤄지는 것입니다.

(이 인터뷰는 2002년 11월22일과 23일에 이루어졌다. 베이징어로 인터뷰하였으며, 박연진씨가 통역을 하였다)사진 임종환 f301s@keb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