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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
2002-12-07

전 우주적 문명 통합 그린 유토피아 문학의 정수

올 한해 두드러진 출판경향 중 하나는 그동안 문단과 독자로부터 냉대받아온 추리소설의 주요 작품들이 완역·출간되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난 도일의 걸작 <셜록 홈스 전집>과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전집>이 큰 인기를 누리는가 하면, 추리문학의 숨은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브라운 신부 전집>이나 고급 역사추리소설 <캐드펠 시리즈>가 완역되기도 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추리소설과 함께 아웃사이더 장르 취급을 받아온 SF소설의 걸작들도 하나둘씩 다시 출간될 채비를 하고 있어 각별히 주목된다. 그 첫 번째 신호탄으로, 미국 SF문학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SF소설가 어슐러 K. 르 귄의 수작 <어둠의 왼손>(시공사 펴냄)과 <빼앗긴 자들>(황금가지 펴냄)이 세련된 편집본으로 재출간된 것은 자유추리문고 문고판으로 처음 르 귄을 접했던 SF마니아들에겐 감격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일반 SF소설을 뛰어넘어, 우리나라에선 아직 소개가 미흡한 ‘유토피아 문학’의 정수라는 점에서 일반 독자들에게도 꼭 권해드리고 싶은 책이다.

르 귄은 ‘헤인 시리즈’라 불리는 일련의 소설 속에서 우주 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는 헤인인들이 거주 행성의 환경에 맞춰 독특한 문명과 세계관을 형성하며 살고 있는 독특한 상황을 설정했다. 이때 광속을 뛰어넘는 통신수단 ‘엔서블’이 발명되면서 이들 문명은 서로 충돌과 연합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로캐넌의 세계>(1966)에서부터 최근작 <세계의 탄생일>(2002)에 이르기까지 11편의 헤인 시리즈 작품들 중에서도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은 권위있는 SF문학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수상할 정도로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어둠의 왼손>은 지구를 모태로 하는 에큐멘 연방에서 인류 연대를 위해 파견된 대사 ‘겐리 아이’가 여러 난관 끝에 에스트라벤의 도움으로 결국 게센과 동맹을 맺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소설에서 과학기술의 진보는 유토피아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전제가 아니며, 좀더 중요한 것은 인간 정신의 성숙, 즉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빛은 어둠의 왼손. 따라서 빛과 어둠, 두려움과 용기, 추위와 따뜻함, 여성과 남성은 둘인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라는 대사는 르 귄 자신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게센인이 남녀 구분이 없는 양성인으로 나오며, 26일을 주기로 ‘케머’라는 발정기 때에만 두 성으로 발현되는 설정도 바로 이 때문이다.

<빼앗긴 자들>에선 쌍둥이 행성 우라스와 아나레스가 배경이다. 두 행성의 교류를 위해 물리학자 쉐벡이 우라스에 파견되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환경은 황폐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실현한 아나레스와 환경은 풍요롭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 우라스가 어떻게 화합의 다리를 놓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집단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났을 때의 화학반응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간의 첨예한 이념 대립의 지구촌 유일한 접점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각별한 의미로 읽힌다.

르 귄은 책 서문에서 자신의 소설을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읽어달라고 요구한다. SF소설가는 현재의 과학기술을 통해 미래의 모습을 예측하는 예언가나 미래학자가 아니라, 독특한 허구적 설정을 통해 현재의 인류와 사회에 대해 기술하는 작가임을 강조한 것이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떠올려 본다면, 이 거대한 우주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이 책은 우리 모두를 ‘진정한 발견자’로 만들어줄 것이다. 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