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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작가 그늘에서 탈출하다
2002-12-10

영화에 중요한 기여를 하면서도 스타와 감독, 프로듀서 등의 그늘에 가려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하는 분업자가 바로 시나리오 작가다. 하지만 아카데미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2002년 마지막 달의 할리우드는 한 사람의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찬사로 들썩이고 있다. 주인공은 찰리 카우프만. 99년 존 말코비치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통로라는 기발한 착상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존 말코비치 되기>의 작가다.

그의 최신작은 니컬라스 케이지 주연의 <각색>(원제 Adaptation). 이번 작품 역시 <존 말코비치 되기>를 연출했던 스파이크 존지 감독과 다시 손잡은 영화지만 할리우드의 관심이 <존 말코비치 되기>팀이 아니라 유독 카우프만에게 쏠리는 것은 카우프만이 자기 자신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케이지가 영화 속에서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으로 등장한다.

<각색>의 공식 크레딧을 보면 이 영화 시나리오는 잡지 <뉴요커>의 여기자 수잔 올린이 실제로 쓴 책 <난초 도둑> (The Orchid Thief)를 토대로 쓰여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카우프만이 각색을 한 셈. 하지만 그는 여기서 한번 더 비틀었다. 카우프만은 자신이 그 책을 각색하면서 겪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고통을 현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섞는 기발함으로 그려냈고, 영화 속에 자신의 쌍둥이 형제 도널드(니컬라스 케이지가 1인2역)를 설정해 할리우드의 공식을 거부하는 자신과 할리우드의 공식 그대로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는 도널드 간의 황당무계한 대화들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겪는 내부갈등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

영화 속 카우프만은 뚱뚱하고 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지고, 여자들 앞에서는 절절 매는, 말하자면 우디 앨런 같은 캐릭터다. 영화는 그가 <존 말코비치 되기>의 촬영현장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쫓겨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난초 도둑>이란 책의 각색을 의뢰받지만 이야기가 풀리지 않아 낑낑대고 있는데 그 책은 <뉴요커>의 여기자 수잔 올린(메릴 스트립)이 난초에 미친 존 르루슈라는 사람을 만나 난초의 꽃과 그 꽃에 대한 열정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르포이다. 극적인 사건 없이, 그리고 해피엔딩도 아닌 삶의 이야기를 어떻게 할리우드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흥행공식들을 비켜가면서 말이다. 이 문제를 껴안고 미치도록 고민하는 그의 옆에서 도널드는 정신분열증의 연쇄살인범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로 명성을 얻어 그를 더욱더 미치게 한다.

원제 ‘어댑테이션’은 각색 이외에 자연에 적응한다는 생존의 방식을 뜻하기도 하는데, 영화는 기발한 방식으로 이 단어가 지니는 이중의 의미를 성공적으로 담아낸다. 올해 가장 혁신적인 스튜디오 영화라는 찬사가 어울리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로스앤젤레스/이남·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