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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테두리,<이누크>
2002-12-12

애니비전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기 전 선생님은 “노란 크레용으로 본을 떠라”고 하셨다. 가끔 검은 크레용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은 혼이 나곤 했다. 검은 선 테두리는 일종의 금기였다.

지난 6월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가 프랑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홍익대 황선길 교수는 수상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만화는 선의 예술이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선 대신 면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검은 선 없이 색으로만 구분한 것이지요. 이런 독특한 형식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게 아닐까요.”

선이 잘 드러나지 않는 작품의 특징은 부드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잔잔한 얘기를 꾸려나가는 데 적당하다. 이런 스타일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 <파워 퍼프 걸>이다. 귀여우면서도 무지막지한 세 꼬마소녀들의 힘은 두툼한 검은색 테두리로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가끔 TV에서 이 작품을 볼 때 왠지 모르게 갑갑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내 무의식 속에 자리한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누크>(원제 Inuk)라는 애니메이션이 최근 비디오로 출시됐다. 우리가 흔히 에스키모라 부르는, 북극에 사는 이누잇 부족의 일곱살난 소년 이누크의 모험담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예의 굵고 검은 테두리가 두드러져 보인다.

그런데 <파워 퍼프 걸>의 형식과는 또 다르다. 검은 테두리가 일정하지 않고 마치 붓으로 그린 듯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이 하나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검은 테두리 속에 갇혀 있지만 배경이 되는 빙산이나 이글루 같은 것은 <마리이야기>에서처럼 색으로만 구분한 것이 두 번째 차이점이다. 그래서 광활한 배경은 시원한 느낌을 주고 검은 테두리 속 원색의 옷을 입은 주인공들의 움직임은 도드라져 보인다. 검은 테두리의 장점과 단점을 작품에서 십분 활용한 셈이다.

형식적인 특징을 하나 더 들자면 간결하고 절제된 선 처리방식이다. 예를 들어 이누크의 친구인 북극 올빼미의 얼굴에는 간략한 선 몇개뿐이지만 표정연기가 입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다. 디지털로 만든 이 애니메이션은 색다른 그림 스타일말고도 순수한 대자연의 세계와 이누잇 부족의 독특한 삶의 정취가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글루의 내부 풍경과 썰매를 끄는 개들의 행태, 동물뼈로 점을 치는 부족장의 모습 등은 어른들이 보아도 신비롭다.

주인공 이누크와 얼음바다에 사는 사악한 인어마녀의 지혜대결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축이다. 마녀의 부하로 등장하는 세 물고기는 일본 스타일의 극악무도하거나 푼수끼가 넘치는 악역 조연이 아닌, 좀 덜떨어진 어리숙한 스타일이어서 오히려 정감을 준다. 어머니로부터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부적을 물려받은 이누크는 동물들과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첫화에서 썰매개 키믹, 북극 올빼미 욱픽과 얼음을 타고 바다로 떠내려가게 된 이누크는 욱픽의 날개를 돛처럼 삼는 기지를 발휘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려움과 싸워 이기는 소년 이누크의 지혜와 용기는 어린이들의 심성을 키워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기(氣)를 모아 적을 무찌른다는 천편일률적인 해결책보다 머리를 써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험담은 어릴 적 본 <꼬마 바이킹 비키> 이후 처음 보는 것 같다.

캐나다 튜브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이 작품은 올해 2월 캐나다 <CBC>에서 최고의 시청률 기록을 세웠고 캐나다 밴프 탤레비전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EBS-TV에서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 6시에 방영되고 있다(비디오 문의: www.greenboat.com, 02-565-7974).정형모/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h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