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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2002-12-13

절묘하게 불편한 아름다움

정말 절묘하게 불편한 제목이다. 불편해서 절묘하고 절묘해서 불편하다. 그런데 이 시집 24쪽 <행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다. ‘끝없는 행려(行旅)가 있을 뿐 돌아갈 곳이 없다/ 컨테이너 박스 안을 둥구는 재고가 된 옷보따리와/ 그 곁의 새우잠처럼’(<행려> 중 ) 그리고 단 4쪽 뒤에 하나 더. 이번에는, 아예 시 첫머리다. ‘그 단칸방에도 몇번쯤 봄눈이 내렸을 것이다// 모가지를 뚝 뚝 떨구어내는/ 낙숫물 소리// 그리고 겨우내 수척해진 몸을 부르르 떠는 전봇대 몇 그루’(<봄빛> 중)….

궁상은 물론 가난 자체를 넘어, 마치 가난의 뼈를 깎는 듯한 비참이 이리 절묘하게 서정-풍경화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정말 아름다움이 불편하고 불편함이 절묘하고 절묘함이 다시 아름답고 불편하다.

박영근은 1979년 데뷔한 이래(그러니까 나보다 문단 데뷔 1년 선배다) 노동(운동)현장을, 그리고 노동자의 삶을, 희망과 절망을, 그리고 전망을 줄기차게 살고 읊은 시인이다. 동시에, 노동자 힘 못지않게 술‘심’(술)도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그 방면에는 거의 전설적인 사람이다. 딱히 주정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1박2일 정도는 아주 간단하게 술로 지새고, 특히 일 바쁜 출판사 업무 방해하면서 아무나 붙잡고 끊임없이 ‘술 진지한’ 소릴 해대는 터라 곤욕을 당한 사람이 여럿 된다. 마음에 안 들면 아예 찾지를 않으니 그 수가 꽤나 한정되어 있지만.

그러던 그가 20년 가까이 반려자이자 동지 노릇을 해주었던 여자한테, 아니나 다를까 버림을 받더니, 술 마시기는 여전히 고래 심줄이고 여전히 다변이되, 아연 말 속에 침묵이 깊어졌다. 그는 정말 ‘하늘의 절반’을 잃은 표정이고 기색이었다. 내색은 없었지만.

그 침묵이 시 속으로 얼마만큼 깊어졌던 것일까 일상의 비극은 노동과 역사에 대한 전망을 회의하게 만들었을까 아니다. 그는 노동자의 정서를 일상-보편화했다. 그것은 ‘노동’이라는 말이 필요없는 극(極)서정이고, 어느 계급의 서정성보다 뼈아픈, 그리고 불편한, 그리고 아름다운, 그러므로 희망-전망적인 서정성이다. 이때 우리는 모든 탁월한 문학은 노동(자)문학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와 연관하여 또 하나. <행려>는 ‘詩 한편을 쓰기가 이렇게 어렵다’로 시작된다. 윤동주 이래 숱한 시인들이 ‘시 쓰는 자의식’을 시로 썼지만, 그중 어떤 시가 <행려> 같은 여정을 치렀으며 이만한 종착역에 달한 적이 있는가 형상화한 노동자의 서정적 자아가 포스트모던풍 ‘문학에 대한 문학’을 관통해버리는 광경이다. 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