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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오!컬트,<프록터의 행운>
2002-12-13

당신을 불운대마왕으로 임명합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반년 만에 만난 우리는 함께 미장원에 가기로 했다(만나도 별 할 이야기가 없는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알차게 시간을 보낸다). 도착해보니 어제로 이곳은 아예 문을 닫았다. 친구 왈 “내가 2년 동안 여기를 다녔는데, 지난달에도 아무 이야기 없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그러나 나에게는 놀랍지 않다. 내 친구, 한마디 덧붙인다. “너 때문이야.” 맞다. 나 때문이다. 내가 원래 재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오게 됐는데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다.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와 동일시하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프록터의 행운>만큼 주인공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던 영화는 없었다. 프록터로 말하자면 자신의 법칙으로 만방에 이름을 드날린 머피가 가슴에 손을 얹고 머리를 조아릴 인물이다. 멀쩡해 보이는 열두개의 의자 가운데 신중하게 골라앉은 의자의 다리가 부러져 있어 엉덩방아를 찧거나 비행기 수화물에서 자신의 가방만 분실되는 일 정도는 그의 ’재수없음’리스트에 끼지도 못한다. 방 안에서 살짝 미끄러졌다는 게 연쇄 충돌을 거쳐 6층 베란다에서 바깥으로 떨어지는 지경이 돼야 “오늘은 좀 운이 나빴네”가 된다.

프록터에게는 막강한 라이벌 또는 피보다 진한 운명의 동료가 있다. 그가 일하는 보험회사 사장의 딸 발레리다. 어느 날 발레리는 혼자 멕시코로 여행을 갔다가 실종된다. 그녀를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회사에서는 마지막 카드로 프록터를 내세운다. 이유라는 게 황당한데 정신과 의사가 발레리의 행동패턴을 전형적인 ‘불운증후군’(정말 이런 게 있나)으로 진단, 그녀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불운을 타고난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가 겪었을 불운을 뒤쫓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발레리도 얼마나 재수가 없는가 하면 휴양지에서 소매치기가 잡아채는 카메라 끈에 넘어져 기억상실증에 걸려 멕시코 바닥을 헤매고 다닌다. 멕시코에 내린 프록터는 유리문에 부딪치고 가방이 망가지는 등 발레리가 겪었던 모든 불운을 따라가며 결국 그녀와 만나게 된다. 함께 온갖 사고를 치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가까스로 뗏목을 타고 원주민 마을을 빠져나온다. 그래서 결국 프록터는 진정한 행운을 만났느냐 하면,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이 탄 뗏목은 나이아가라 정도는 돼 보이는 거대한 폭포를 향해 유유히 흘러간다.

사지 멀쩡하게 잘사는 네가 무슨 불운을 논하냐고 정색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불운의 체감도 순전히 주관적이다. 무게를 잡고 있어 보이는 척해야 하는 자리에서 온갖 실수를 벌이고 쓰레기매립장처럼 황량해진 가슴을 끌어안고 돌아올 때마다 나는 이 영화를 되새기며 위안하곤 했다. 프록터도 있는데 나 정도야… 하도 자주 그러다보니 이제는 일이 잘 풀리면 막 불안하고 식은땀이 난다. ‘이건 나답지 않아.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사고가 기다리고 있는거야.’ 철학도 바뀌었다. 재수없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 말자, 인생의 지뢰밭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자꾸나. 나 이제 처음 만난 킹카 앞에서 훌러덩 넘어져 앞니가 깨지더라도 반야심경을 외우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아, 산사의 종소리가 들린다. 프록터, 너로 인하여 나는 진정한 마음의 평온을 얻게 되었구나.김은형/ <한겨레> 문화부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