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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영혼을 잠식한다,<케이프 피어>
2002-12-20

Cape Fear, 1962년감독 J. 리 톰슨 출연 그레고리 펙, 로버트 미첨 자막 영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타이어 화면포맷: 1.85: 1 아나모픽 와이드스크린 오디오 돌비 디저탈 2.0 출시사 콜럼비아

빌리 와일더, 카렐 라이츠, J. 리 톰슨, 이들은 벌써 끄트머리에 면해 있는 2002년 올해에 세상을 하직한 영화감독들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요즘의 (젊은) 영화 관객 가운데 ‘리 톰슨은 도대체 누구지’ 하고 의문을 품을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빌리 와일더야 <선셋 대로>(1950)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 같은 미국영화의 걸작들을 만들어낸 명감독이고, 카렐 라이츠는 어떤 영화사 책이든 뒤져보면 영국 프리시네마 관련 장(章)에 꼭 등장하곤 하는 인물인데, 하면서 말이다. 사실 리 톰슨(1914∼)은 앨프리드 히치콕이나 존 포드처럼 거의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이름의 영화감독은 아니다. 아니면 그는 <나바론>(1961)이나 뒤에 찰스 브론슨이 주연을 맡은 액션물들을 만든 영화감독 정도로 치부되면서 어떤 오락영화들에서는 꽤 쓸 만한 연출솜씨를 발휘했던 인물 정도로 평가되곤 한다. 그런 리 톰슨을 한 사람의 ‘작가’로 본 비평서가 나온 것은 그의 감독 데뷔 50년이 되는 지난 2000년의 일이었다(스티브 칩놀, , 맨체스터대학출판부 간행).

리 톰슨을 정말 ‘작가’로 평가할 수 있는가는 찬반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복잡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그가 일찍이 영국 영화계의 총아로 촉망받으며 영화경력을 시작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키친 싱크 리얼리즘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영화들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에 손대면서 여러 편의 수작들을 만들어낸 리 톰슨은, 1959년쯤에는 이미 캐롤 리드와 데이비드 린의 대열에 함께 들 출중한 젊은 영화감독이란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이 명민한 영국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적지 않은 영국인 감독들의 뒤를 따라 할리우드에 입성한 뒤로 점차 하락의 길을 걷는다. 리 톰슨의 이 미국행은 그의 스케일 큰 전쟁영화 <나바론>에서 주연을 맡았던 그레고리 펙의 ‘초대’로 이뤄졌다. 펙은 <나바론>을 찍을 때 리 톰슨이 보여줬던 연출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자신의 제작사에서 만들 다음 (미국)영화에 메가폰을 잡으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어려서부터 할리우드행을 꿈꿨던 리 톰슨은 펙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케이프 피어>였다. 리 톰슨은 자신의 이 첫 미국영화를, 그동안 영국에서 쌓은 연출력을 십분 발휘해 자신의 최고작으로 만들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프 피어>는 이후 하강곡선을 그리게 될 리 톰슨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분기점에 위치하는 영화다.

존 맥도널드의 소설 <집행자>(1957)를 영화화한 <케이프 피어>는 나중에 마틴 스코시즈가 리메이크하게 될 동명의 영화와 대략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스토리 라인을 따라간다. 영화는 샘 보든(그레고리 펙)이란 변호사의 증언으로 감옥에서 무려 8년을 썩었다고 믿는 맥스 케이디(로버트 미첨)가 출옥 뒤 샘과 그 가족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아마도 현재의 관객이 리 톰슨의 <케이프 피어>를 보게 된다면 그건 스코시즈의 <케이프 피어>(1991)를 보고 난 뒤가 될 가능성이 꽤 높을 터인데, 그럴 경우 리 톰슨의 영화는 어쩌면 스코시즈 영화의 ‘차분한 요약판’처럼 보일 수도 있다. 리 톰슨의 영화가 일종의 요약판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우선 이것이 스코시즈 영화보다 20여분 정도 짧은데다가 스코시즈 영화보다 약간 더 많은 시간을(후반부 약 30분 정도) 케이프 피어 강에서 벌어지는 맥스의 끔찍한 위협과 샘의 방어에 할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 톰슨의 영화는 예전 영화답게 스코시즈 영화만큼이나 강도높은 폭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하지만 앞에서 받았던 상대적으로 차분하다는 인상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케이프 피어 강에서의 대결 시퀀스에 이르면 부적당한 것으로 여겨질 공산이 크다. 맥스가 샘의 부인과 딸을 차례로 위협하고 샘이 그와 맞서는 이 시퀀스에서 리 톰슨은 히치콕에게서 배운 비교적 정공법적인 방식으로 서스펜스와 스릴을 누적해내고 증폭시켜간다.

리 톰슨의 <케이프 피어>가 스코시즈의 <케이프 피어>와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은 흔히 지적하듯 캐릭터의 복잡성에 있다. 예컨대 스코시즈가 그려낸 샘이 바람도 피우고 직업적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 등 허점이 노출된 인물이라면 전작에서의 샘은 가정에 충실한 인물이고, 스코시즈 영화에서의 샘의 딸이 아버지의 유약함이 싫고 그래서 악에 대해 매혹되기도 하는 인물인데 반해 리 톰슨의 영화에서 그녀는 화목하고 안락한 중산가정의 어여쁜 딸일 뿐이다. 그렇다고 리 톰슨의 영화가 무턱대로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그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는 처음에는 유순하기만 했던 주인공 샘이 맥스의 과도한 폭력을 이겨내면서 맥스만큼이나 증오심 가득한 인간으로 변화하고 만 것을 보게 된다. 한 인간의 야만적인 광포함은 다른 사람에게로 고스란히 전염이 된다는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