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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번째 007 영화 <어나더 데이> 멜버른 시사기 <2>
2002-12-21

제임스 본드,`악의 축`으로 뛰어들다

본드가 짐바브웨 감옥에 수감됐다면 <007 어나더데이>는 지금처럼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가 활약하는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판타지를 떠받치는 배경만은 지극히 사실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 영화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부시의 발언이 있기 전에 기획됐지만, 그곳을 공격하는 미국인들의 심리만은 같은 수원에서 솟아나온 물줄기다. 어느 작은 나라가 전쟁의 위협에 직면한 채 불타고 있는데 미군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장면- 이 영화에선 영국 정보부지만- 은 할리우드 액션영화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종의 버릇이다. 그런 영화를 보고 자란 미국인이 약소국에서 살게 됐을 때 그 버릇을 ‘그건 판타지였으니까’라고 말하면서 손쉽게 팽개칠 수 있을지, 소심한 약소국민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타마호리는 의아해할 것이다. 유독 <007 어나더데이>만 문제삼는 까닭이 무엇일까, 남미 사람을 모두 마약상으로 그리는 영화들은 재미있게 보면서 불공평하지 않은가라고. 그런 불공평을 불평하기엔 그는 신원이 남다른 감독이다. 뉴질랜드 태생인 그는 자신의 땅에서 저주받은 이방인이 되어버린 마오리족의 모순을 그린 <전사의 후예>로 시선을 끌어 미국의 부름을 받았다. <007 어나더데이>는 <머홀랜드 폴스> 같은 작은 영화들을 주로 만들다가 처음 손댄 블록버스터. 이 영화로 그는 평단과 극장으로부터 찬사를 얻어냈다. 과연 그의 재치는 호버크래프트 추격신과 펜싱시합 같은 액션뿐 아니라 자그마한 농담에서도 빛을 발한다. 타마호리는 007 시리즈 열아홉편을 모두 봤고 그 영화들 중 일부를 <007 어나더데이>에 인용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미 국가정보부(NSA) 요원 징크스를 연기하는 할리 베리가 <닥터 노>의 본드걸 우슬라 안드레스처럼 비키니를 입고 바다 속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추운 날씨인데도 수십번을 다시 찍은 그 장면은 007 시리즈를 보고 자란 남자들의 판타지를 따뜻하게 되살려줄 것이다. 본드에게 무기를 대주는 닥터 Q가 보여주는 지하창고 역시 나이든 관객이 흐뭇하게 웃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007 썬더볼>에 나오는 제트엔진이 달린 비행기구와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향수어린 특수구두는 그 많은 비밀장비는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귀여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런데 유색인종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던 그의 시선과 초심은 또 어디로 갔을까. <007 어나더데이>에는 ‘전사의 후예’타마호리가 없다.

`이것은 오락`?

<007 어나더데이>의 인상적인 첫 장면은 그 답을 찾으러 가는 입구가 될 수도 있다. <007 어나더데이> 처음에 떠오르는 자막은 ‘북한, 북청해안’. 그리고 북청에선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거대한 파도 위에서 세명의 비밀요원이 서핑보드를 타고 대담하게 해안에 잠입한다. 한밤의 어둠 위에 하얀 포말을 흩뿌리는 그 파도는 하와이 마우이에서 찾아낸 것이다. 프로듀서 앤서니 웨이는 세명이 동시에 서핑할 수 있는 파도를 붙잡기 위해 하와이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 제작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리고 관객이 원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스펙터클이었다. 그리고 리 타마호리에겐 그들의 요구에 효과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또 그 재능은 찬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원치 않은 분단의 상징, 지금 남과 북이 힘들여 제거하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지뢰를 제임스 본드의 화려한 액션에 소도구로 동원하지만 않았더라면.

<007 어나더데이>를 둘러싼 한국인의 분노는 어느 정도 성급하기도 하다. 미리 퍼진 영화 이야기 중 일부는 과잉해석됐다는 반박을 불러올 수도 있다. 한국 농민은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본드가 하늘에서 떨어뜨린 고급 자동차를 응시하지 않는다. 소를 끌고 가는 가난한 농촌이 마음에 걸린다고 한국 관객은 어두컴컴하고 초라한 집에서 흘러나온 <집으로…>의 온기에 열광했었다. “이것은 오락”이라는 절대명제 앞에서라면, 릭윤의 발언도 이해할 만하다. “쿠바나 콜롬비아가 나왔을 때와 달리 지금 <007 어나더데이>가 민감한 반응을 얻는 것은 아무래도 무대가 한국이기 때문인 것 같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한국 관객은 다른 나라를 부당하게 묘사하는 할리우드영화를 좋아한 전력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부시의 ‘악의 축’ 발언과 미군 장갑차에 치어죽은 두 소녀가 몰고온 파장이 한국인의 마음을 바늘 끝처럼 갈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소녀들의 죽음을 통해 그들 앞에서 한-미행정협정이 추상에서 현실이 되었듯, ‘본드, 제임스 본드’가 쾌락의 영웅에서 부시 시대의 ‘미국적 세계전략’수행자로 변한 것이다. 본드를 만나기 위해 극장앞 레드카펫 주변에 몰려든 수많은 멜버른 시민들에게 그 바늘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잊을 사람은 잊고 기억할 사람은 기억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라지만, <007 어나더데이>가 개봉하는 12월31일 한국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멜버른=김현정 parady@hani.co.kr

자오 역의 릭윤 인터뷰“고작 세 번째 작품이 007이라니!”

릭윤은 <007 어나더데이> 홍보를 위해 홀로 한국을 찾았다. 릭윤이 이 영화에서 연기한 인물은 악당 구스타프 그레이브스의 심복이자 북한군 장교인 자오. 폭발사고와 성형수술 후유증으로 흉측한 얼굴을 갖게 된 자오는 007 시리즈의 오랜 전통에 따라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릭윤은 자신의 세 번째 영화가 007 시리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지만, 한국계 핏줄을 잊지 않은 듯 미군 장갑차 사고를 언급하면서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007 어나더데이>는 북한을 적으로 설정했다.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본 네티즌들은 가 한국을 비하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미군 장갑차 사고는 정말 유감이다. 내 여동생이나 딸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지금처럼 침착하게 대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007 어나더데이>는 특정한 국가를 공격하는 영화가 아니다. 007 시리즈는 항상 사악한 욕망을 가진 한 개인을 적으로 삼았고, <007 어나더데이> 역시 그런 개인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말하는 영화다. 내 배역의 이름을 보라. 한국엔 자오라는 이름이 없다. 그는 북한군에 속해 있지만, 국적은 정확하지 않다. 그런 자오가 왜 한반도의 통일을 꿈꾸게 됐는지, 왜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에 말려들게 됐는지 흥미롭지 않은가. 만일 <007 어나더데이>가 정말 한국을 비하하는 영화였다면 난 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중에 태어날 내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부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당신은 아시아인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소망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가.

→ 그렇다. 나는 <분노의 질주>에 출연했고 <피플>이 선정한 가장 섹시한 남자 다섯명에 뽑히기도 했다. 게다가 고작 세 번째 영화가 <007 어나더데이>이지 않은가! 내 아버지와 내가 그랬듯, 007 시리즈를 보면서 자란 수많은 사람들은 제임스 본드를 자신의 영웅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영화가 런던에서 첫 시사회를 가졌을 때는 영국 여왕까지 극장을 찾았다. 내 이런 활동이 아시아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007 어나더데이>는 시리즈 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를 들인 액션영화다. 쵤영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 리 타마호리 감독은 모든 배우들에게 직접 액션연기를 하라고 요구했다. 그 때문에 날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나는 삭발한 채 오픈카를 타고 빙판 위를 질주하느라 무척 추웠다. (웃음)

당신은 월스트리트에서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다가 배우가 됐다. 후회한 적은 없는가.

→ 내가 돈을 벌고 싶었다면 다른 일을 했을 거다. 난 배우말고도 택할 수 있는 직업이 수없이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도전하고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원한다. 내가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조차 내 선택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 내 모습이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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