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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번째 007 영화 <어나더 데이> 멜버른 시사기 <1>
2002-12-21

제임스 본드,`악의 축`으로 뛰어들다

제임스 본드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평소처럼 세계를 구하기 위해 북한에 잠입한 그는 북한 군복 대신 ‘청천1동대’라고 적혀 있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있었다. 시사회장인 멜버른 크라운 시네마에 모인 기자들 누구도 그것이 정말 북한 군복인지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한국 기자들만은 그 사소한 소품을 너그럽게 지나칠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007 어나더데이>는 1억4200만달러를 들인 블록버스터고, 블록버스터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두 시간의 환상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오직 한 나라에서만은 관객의 현실감각을 날카롭게 자극할 것이 분명했다. 이상하고 서글픈 아이러니였다.

살인면허를 박탈당하다

<007 어나더데이>는 냉전의 싸늘한 기운이 50년의 무게로 가라앉아 있는 DMZ에서 시작한다. 거대한 파도를 타고 북한에 잠입한 제임스 본드는 무기 거래상으로 위장해 타락한 군인 문 대령을 만난다. 문 대령은 장군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무기를 밀거래하고 다이아몬드를 수집하는 인물. 누구인지 모를 첩보원의 배신으로 정체가 탄로난 본드는 북한 군인들과 추격전을 벌이다 문 대령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고문으로 채워진 14개월이 지난 뒤, 본드는 포로교환 형식을 통해 북한을 벗어나지만 믿었던 상관 M은 냉정하게 그의 살인면허를 박탈한다. 본드는 병원에서 탈출해 문 대령의 심복 자오를 뒤쫓다가 끝난 줄 알았던 음모의 실체와 마주친다. 문 대령이 모았던 다이아몬드는 태양열을 이용해 원하는 어떤 장소라도 파괴할 수 있는 무기 ‘이카루스’를 제작하기 위한 재료였다.

주연 피어스 브로스넌은 “<007 어나더데이>는 첫 번째 영화 <닥터 노>가 제작된 지 꼭 40년 만에 만들어진, 스무 번째 007 영화다. 우리는 뭔가 다른 걸 시도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숀 코너리 이후 최고의 제임스 본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브로스넌의 장담처럼, <007 어나더데이>는 새로운 시도와 옛 시리즈의 향수가 적절하게 배합된 매끈한 액션영화다.

자오와 제임스 본드가 30cm 두께의 빙판 위에서 벌이는 자동차 추격신은 40년이나 묵은 관습이 얼마나 신선하게 부활할 수 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벌판과 녹아내리는 얼음궁전 내부를 질주하는 두대의 자동차는 리얼리티를 따지는 관객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하다. <007 어나더데이> 제작진은 자동차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빙판을 찾기 위해 아이슬란드에서 알래스카까지 추운 지방을 샅샅이 뒤졌고, 희망없이 돌아간 아이슬란드에서 알맞게 얼어 있는 빙판을 발견했다. 본드가 타고 다니는 투명자동차 역시 느닷없이 나온 황당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프로덕션디자이너 피터 라몽은 “미국 제트추진연구소가 탱크에 응용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했다. <007 어나더데이>는 치밀하고 탄탄한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거쳐 제작된 영화인 것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것은 제임스 본드가 처참하게 무너진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북한군 포로로 잡힌 본드는 물고문을 당하고 전갈들이 기어다니는 감옥 바닥에 내던져지며 온갖 약물을 주입받는다. 제임스 본드가 두려움에 떨 수 있고 폐품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돌아온 뒤에도 “자넨 이제 쓸모가 없어”라는 무정한 선언과 함께 버림받는다. 감독 리 타마호리는 이 모험을 “이안 플레밍의 원작에 충실했다”고 설명했다. 더이상 새로운 무언가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38년 전 사망한 작가가 무엇을 쓰고 싶었는지 짐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수십년 방치된 땅을 파헤친 그 시도는 공감을 호소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살아났다.

`전사의 후예`는 어디로 갔나?

<007 어나더데이>는 이처럼 1억달러가 넘는 제작비를 낭비하지 않는 성실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 스펙터클에 취한 타국 기자들이 호주로 날아온 제작진에게 영화의 배경과 현실성을 묻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한국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타마호리는 본드와 대결하는 악당 문 대령이 북한을 대표하지는 않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적대적인 인물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문 대령의 아버지 문 장군이 남북한의 관계, 북한과 서방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이끌고자 노력하는 대목에선 정치적으로 균형잡힌 시선을 취하고자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마호리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현존하는 가장 지옥 같은 국가인 것 같다.

제임스 본드 역 피어스 브로스넌 인터뷰“내 연기, 마음에 든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제임스 본드는 이미 내 일부가 됐다”고 말했다. 50을 눈앞에 둔 배우로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짐이겠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롭고 침착했다. 007 시리즈 때문에 얻은 것이 훨씬 많다는 브로스넌은 다섯 번째 007영화의 출연 계약을 마친 상태.

제임스 본드처럼 수없이 영화로 만들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 영화는 어떻게 준비했나.

→ 지금까지 제임스 본드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이안 플레밍의 원작을 읽어보면 그가 한 남자,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고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007 어나더데이>는 그처럼 본드의 평범한 면을 살린 영화다. 내 연기도 가장 마음에 든다. 이 영화는 내가 출연한 네 번째 007 시리즈다. 오랜 시간 007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경험과 함께 자신감을 쌓았다. 좀더 편안해지기도 했고. 그 덕분에 최고의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었다. 프로듀서와 감독의 도움도 컸다. 리 타마호리 감독은 나를 다소 놀라게 했다.

<007 어나더데이>는 몸을 쓰는 액션이 유독 많다. 직접 연기했는지.

→ 물론이다. 베드신도 직접 연기했다. (웃음) 수륙양용차인 호버크래프트 추격신 같은 경우는 매우 힘들었지만, 모든 액션을 직접 하려고 노력했다.

007 시리즈에서 Q를 연기했던 데스먼드 르웰린이 1999년 세상을 떠났다. 존 클리스가 르웰린 대신 Q로 출연했는데, 새로운 Q와 작업한 느낌은.

→ 존 클리스는 대단한 배우고 코미디에 관한 감각도 뛰어나다. 그와 함께한 느낌은 물론, 즐거웠다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영화사 아이리시 드림타임을 운영하고 있다. 카메라 뒤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는 경험이 어땠는가.

→ 지금까지 네편의 영화 <네퓨>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매치> <에블린>을 제작했다. 나는 프로듀서가 하는 일이 좋다. 소재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배우다.

당신은 영국 드라마센터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배우의 조건이 있다면.

→ 배우는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해야 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아야만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다.

<007 어나더데이>는 한국을 비하했다는 이유로 논란을 빚고 있다. 이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북한이나 한국에 관해 조사하거나 공부한 적이 있는가.

→ 나는 한국을 전혀 모른다. 나는 배우고, 그런 일은 내 몫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을 배경으로 삼은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본드는 항상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데, 한반도는 냉전이 끝난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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