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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프랜차이즈 007 시리즈의 정치학 <2>
2002-12-21

본드, 제임스 본드 ˝나의 냉전은 평화보다 아름답다˝

냉전이냐 데탕트냐, 민감하게 바뀌는 적들

64년에 세상을 떠난 이언 플레밍은 냉전시대를 살다 갔고, 그 스스로도 골수 반공주의자였다. 그의 소설에서 악당이 소련과 연관돼있지 않은 건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뿐이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미치광이나 무국적의 테러리스트 집단이 나오더라도 직간접적으로 소련과 연관이 돼 있다.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화는 동서화해의 기운을 담고 출발한다.

62년 007 영화로 처음 나온 <닥터 노>의 악당 닥터 노는, 원작에서 소련을 위해 일하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내겐 동이나 서나 다 마찬가지”라며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두 번째 영화 <위기일발>(1963)에서 제임스 본드를 제거하려는 악당은, 원작처럼 KGB가 아니라 무국적의 테러조직 ‘스펙터’가 KGB 안에 심어놓은 요원이다. 주로 슬라브, 라틴, 독일인으로 구성된 스펙터는 플레밍의 창작품으로, 소설에서는 케네디와 후르시초프를 중심으로 미-소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던 60년대 초반 이후작에서 중심적인 악역을 떠맡는다. 영화 007 시리즈는 스펙터를 원작보다 자주 등장시킨다. 악당과 소련과의 관계는 희미해진다.

이어 70년대 본격적인 데탕트 시대에는 마약조직(<죽느냐 사느냐>,1973), 국제적 살인청부업자(<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1974), 세계 정복의 야심에 가득 찬 해운왕(<나를 사랑한 스파이>, 1977)을 악역으로 삼는다. 심지어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제임스 본드는 KGB 공작원과 함께 손잡는다. 이때까지는 “데탕트 시대에 적합한 내러티브 전략을 취했다”는 채프먼의 분석이 유효하다.

그러나 79년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고, 80년 미국 대선에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물론 영국에도 대처의 매파정부가 도래한다. 81년작 <포 유어 아이즈 온리>에서 본드는 바다에 침몰한, 핵잠수함 통제장치를 놓고 소련과 쟁탈전을 벌이며, 83년 <옥토퍼시>에서는 소련군 간부와 맞붙는다. 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해 개혁과 개방정책을 펴면서 본드의 적은 소련 정부에서 다시 멀어진다. 89년 <살인면허>에서 본드가 친구인 CIA 요원 레이터의 복수를 위해 맞서는 건 마약조직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뒤의 007

제임스 본드는 냉전과 함께 태어났을 뿐 아니라, 냉전을 먹고 살아왔다. “법의 판결없이 죽일 수 있다”는 ‘00’이라는 번호 자체가, 공작정치의 필요성이 대중에게 먹힐 수 있었던 냉전시대에 가능했던 것이다. 89년 베를린 장벽 와해와 함께 냉전이 사라지자, 007 시리즈는 오랫동안 주춤했다. 내부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닥터 노>부터 <살인번호>까지 16편을 만들었던 제작자 알버트 브로콜리가 심장질환으로 드러누웠다(그는 96년에 세상을 떠났다). 뉴욕 토박이인 의붓아들 마이클 윌슨과 딸 바버라 브로콜리에게 007 시리즈 제작의 전권이 넘어갔다.

<살인면허> 이후 6년 만인 95년에, 피어스 브로스넌을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내세우고 나온 <골든 아이>는 실루엣으로 처리된 반라의 여인들이 레닌 동상 위에 올라가 춤을 추듯 해머로 동상을 부수는 오프닝 타이틀로 시작한다. 반라의 여인과 레닌 동상의 기묘한 대조 속에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조롱과 함께, 애도 섞인 조곡의 분위기도 감돈다. 본드에게, 냉전의 양축의 하나인 소련은 부모와도 같은 존재였을지 모른다. 장례식을 마친 사람처럼, 눈을 애써 찌푸리며 진지해 보이도록 표정관리를 하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여자로 교체된 신임국장 M으로부터 “성차별주의자, 여성혐오주의자”라는 핀잔을 듣는다. 이전의 007 시리즈에 대한 자기 풍자이다.

<본드 앤 비욘드>의 저자 토니 베네트는 본드의 내러티브 구조를 분석하면서, M을 본드의 아버지, M의 비서인 미스 머니페니를 어머니에 빗대면서 본드 이야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중요한 장치로 쓰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M에게서, 또 여자에게 유혹돼 이끌려간 악당에게서 거세공포를 느끼고 그것과 싸우는 ‘남근의 모험’이 서스펜스를 더하면서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앵글로색슨계의)민족 이데올로기를 중층적으로 연결하는 ‘본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소련이 사라진 시점에서, M이 여자로 교체된 건 여권의 존중이라기보다 이제 본드가 아버지가 됐다는 자기 선언처럼 들린다. 실제로 여자국장 M은 이전의 M처럼 냉정하지 못하며, <언리미티드>(1999)에서는 잘못된 판단을 내려 적의 포로가 됐다가 본드에 의해 풀려나기도 한다.

<골든 아이>에서 본드의 적은 러시아 정부가 아니라, 정부에 반역을 꾀하는 우주기술 담당자이다. 그리고 그의 배후로 60년대 007 시리즈의 스펙터와 유사한 무기밀매집단 ‘야누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악당들의 음모 앞에 러시아 정부는 무기력하며, 본드는 러시아 도시 중심가에서 러시아군과 경찰을 마구 깔아뭉갠다. 97년의 <네버 다이>는 미디어 재벌을, <언리미티드>는 국제 테러리스트와 석유재벌이 악당으로 세우면서 ‘포스트 냉전’ 이후에 새로운 적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인다.

‘악의 제국’ 소련, ‘악의 축’ 북한

영화 007의 정치적 후각은 예민하다. 데탕트를 미리 감지하는가 하면,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칭한 레이건이 등장하자마자 소련과 맞붙었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두고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분석한다. M은 왕이고 본드는 기사이다. 여자와 악당은 미녀와 야수를 대변한다. 이런 이야기의 원형적 요소에 힘입어 본드가 사는 세계에는 ‘선과 악 같은 원초적인 서사적 관계’가 설정된다. 그리고 거기서 “플레밍은 기본적인 대립쌍을 찾는다.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힘의 충돌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클리셰에 기댈 수밖에 없다. 클리셰를 사용하려면 여론을 따라야 한다.”

에코의 말대로 본드가 현실의 공산주의자와 가상의 테러리스트를 왔다갔다하며 싸우는 건 국제정세 변화에 따른 여론의 추이를 발빠르게 쫓은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여론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여론이며, 레이건 등장 이후 서구 안에서도 미국과 유럽의 여론이 갈린다. 최근 9·11 테러 이후 부시의 대아랍전쟁을 두고 미국 안에서도 찬반이 갈린다. 007은 80년대 초에 이미 레이건의 노선을 따랐다. 90년대 들어서는 가상적 테러리스트를 악당으로 세우면서도 그의 전력에 미국의 적성국가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미국 우파가 선호하는, 또는 만들어내는 여론에 편승한다. <골든 아이>의 무기밀매집단 야누스는 걸프전 때 이라크를 지원했다. <언리미티드>의 테러리스트 르나드는 아프간, 이라크, 이란과 평양에서 활동했다. 마침내 레이건 등장으로부터 다시 20년이 지난 지금 제임스 본드는 북한과 싸운다.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이언 플레밍은 자신의 소설이 “작가가 베개에서 꿈꾸는, 자신이 해봤으면 하는 것들에 대한 판타지”라며 진지하게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007 영화의 제작자나 감독(<어나더데이>의 리 타마호리까지)도 한결같이 ‘그냥 오락영화로 봐달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과연 오락영화로만 그칠 수 있을까. 한반도에 대해 잘 모르는, 서구의 관객이 <어나더데이>를 보고 편견에 적개심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임범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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