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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9일치 <조선일보> 사설
2002-12-24

김선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한나라당이고 이회창 후보다. 그러나 진짜 참담한 패배를 한 것은 아마도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일 것이다. 조중동이 노무현 후보를 떨어뜨리고 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팬티까지 벗고 뛰었고 마지막에는 못 보여줄 꼴까지 보였는데도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백미는 선거날 아침 <조선일보> 사설이다. 이미 본 사람들도 많고,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사설이라며 오려놓은 사람들도 있고, 인터넷을 통해 지구촌을 여러 바퀴 돌았을 테지만 못 읽은 사람들을 위해 옮겨본다. 제목은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이다.

“16대 대통령선거의 코미디 대상은 단연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다. 선거운동 시작 직전, 동서고금을 통해 유례가 없는 여론조사로 후보단일화에 합의하고, 선거운동 마감 하루 전까지 공조유세를 펼치다가, 투표를 7시간 앞둔 상황에서 정씨가 후보단일화를 철회했다. 이로써 대선정국은 180도 뒤집어졌다. …. 어쩔 수 없이 벌어진 급격한 상황 변화 앞에서 우리 유권자들의 선택은 자명하다. 지금까지의 판단기준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뒤집는 것이다. … 오늘 하루 전국의 유권자들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며 투표소로 향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이제 최종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단일화 이후 노 후보의 지지율은 모든 조사에서 최대 11%까지 앞섰다. 북핵위협에도 끄떡하지 않던 노 후보의 지지도는 행정수도 이전문제가 불거지면서 떨어졌다. <조선일보>가 수도권 땅값이 떨어지고 서울이 공동화할 것이라고 최후의 일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다음날부터 격차가 줄어들어 최하 2%까지 좁혀졌다. 그러나 선거일 3~4일 전부터 격차는 다시 벌어져 5% 정도로 고착되었다. 역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밤에 정몽준씨가 노 후보 지지철회를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최후의 일격이라고 믿고 이제까지 쓰고 있던 불편부당이라는 가면을 과감히 벗어던졌다. 노무현 떨어뜨리기 확인사살에 들어갔다. 한밤에 사설을 바꾸어 쓴 것이다. 정몽준마저 노무현을 버렸는데 유권자 여러분은 이제 판단기준을 180도 뒤집어야 한다며 뒤집기라는 단어를 두번씩이나 쓰면서 뒤집기를 독려한 것이다.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은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을 교과서로 삼았다. 그들이 주장하고 지시하는 대로 춤추었다. 월드컵이나 촛불시위 때 나타난 인터넷과 네티즌들의 힘을 과소평가했던 탓이다. 수구언론이 한나라당이 좋아서라기보다 자신들의 언론권력을 영원히 휘두르기 위해서라는 사실에 짐짓 눈감았던 한나라당이나 이회창 후보도 그런 점에서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희생자이다. 그러나 가장 큰 희생자는 국민이다. 이번 선거기간 동안 많은 가정에서 세대간에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동료, 친지, 동창들 사이에 서로 말이 안 되는 상대라며 등을 돌린 경우도 많았다. 그 원인은 바로 수구언론에 있다. 인터넷이 무엇인지 모르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오로지 수구언론을 통해서만 판단하는 층 가운데 선거결과를 놓고 망연자실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랜 세월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면서 보아야 할 것을 못 보게 하고 들을 것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한 조중동 등 수구언론은 국민들 사이에 메우지 못할 간극을 만들어놓았다. 대선에서 참패한 수구언론이 환골탈태할 수 있을는지….김선주/ <한겨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