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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의 무게,<메모리즈 오프>
2002-12-26

컴퓨터 게임

아야카와 유에와 토모야. 언제부터 셋이 함께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동네 양어장을 습격해 잉어를 풀어놓고, 오렌지 주스를 온 집안에 뿌리며 즐거워하고, 야단을 맞으며 울음을 터트린다. 늘 같이 있었다. 같이 목욕하던 어린 시절이 지나 중학교에 들어갔어도 그랬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둘만 간 유원지에서 아야카는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고 떠들고 겁내던 놀이기구도 서슴없이 탄다.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명랑해한다. 그리고 갑자기 침울해진다. 혼자 가버린 아야카를 따라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쫓아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다. 공원에 혼자 앉아 있던 아야카를 간신히 찾아낸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찾아온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떠나버렸다. 어느 비오는 날, 아야카는 우산을 들고 토모야를 마중나갔다. 그리고 차에 치인다. 그래도 토모야는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간신히 늦지 않게 교문에 들어선다. 이상하게 잠이 많아졌다. 아침 조례를 시작하기도 전 이미 자기 시작하고, 점심 시간이 되기 전에는 깨어나지 않는다. 행여 원하는 빵이 다 팔렸을까 정신없이 매점으로 뛰어간다. 배를 채우면 또 잔다. 종례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일어난다. 가끔은 친구들과 오락실에 들르기도 하지만 대개 집으로 간다. TV를 보고 또 잔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흘러간다.

<메모리즈 오프>는 사랑을 얻자마자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다. 사랑을 깨닫고 키워가는 두근거림을 보여주는 다른 연애 게임과는 다르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이미 깊숙이 자리잡은 사람을 지워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후타미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에서도, 카오루의 쓸쓸한 표정에서도, 미나모의 수줍은 미소에서도 아야카가 떠오를 뿐이다. 새로운 누군가와 만나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는다. 지금 존재하는 사랑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절대 이길 수 없다.

<메모리즈 오프>는 경쾌한 게임이다. 토모야는 늘 실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입담은 그 어떤 개그 게임에도 뒤지지 않고, 인기 폭발의 단팥빵과 카레빵을 매일 확보하는 일만 빼놓고는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메모리즈 오프>는 슬픈 게임이다. 토모야가 자고 또 자는 건 깨어 있으면 아야카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도 진지해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민없는 대화 속에서는 추억할 것이 없다. 가볍게 또 가볍게 맞받아치는 무의미한 말들의 오고감 속에서 묻어둔 상처는 얌전하게 제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새로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일상을 직면하려는 순간, 옛 기억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애써 봉합해둔 상처가 다시 벌어진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이 상처가 얼마나 아픈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죽은 아야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메모리즈 오프. 시간은 위대한 무덤이다. 사랑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이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 세상 역시 끝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마음은 진심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잊더라도 사랑했던 시간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했던 즐거움도 아쉬움도 점점 멀어져 간다. 다시 행복해지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미나모와 함께 시험 공부를 하는 대신 혼자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코요미 누나의 전표 정리를 도와주는 대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기억은 엔딩 화면을 볼 때까지 바래지 않았다. 나는 이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실패했다. 박상우/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