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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의 오! 컬트 <바스키아>
2002-12-31

현대미술 매직 서커스에서 만난 야생동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군이 있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세상에는 두 가지 예술계가 있다. 보통 이상으로 고귀하고 우아하며 탐미적인 풍요로움의 예술, 그리고 보통 이하로 비천하며 번뇌하고 갈구하는 고통의 예술. 감상자들은 풍요로움의 예술을 통해서는 귀족적인 상류사회에 대한 갈망을 간접체험하고 고통의 예술을 통해서는 보잘것없는 자신의 삶을 위로받는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기쁨은 풍요로움의 향기가 넘쳐나기 때문이며 고흐와 이중섭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보다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훌륭한 예술이 있고 기특한 예술이 있다. 우아한 예술이 있고 안쓰러운 예술이 있다. 장난스러운 예술이 있고 장인정신을 담은 예술이 있다. 압도적인 예술이 있고 용기를 주는 예술이 있다. 이러한 양분법은 전적으로 예술가의 태생에 의해서 파생된다. 문화선진국에 고귀한 신분의 풍요로운 가정에서 자라난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식민지에서 비천한 신분의 궁핍한 가정에서 자라난 예술가가 있다. 이들이 창조해낸 작품들의 용법, 효능, 효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한쪽에서는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서 예술이 필요하고 다른 쪽에서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술이 필요하다. 한편은 ‘나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한 예술’이 있고 한편은 ‘너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예술’이 있다. 감상자들은 자신의 처지와 그날의 기분과 형편에 따라서 적절한 것을 수시로 취하면 된다. 예술이란 다양한 종류의 가상현실이다.

바스키아라는, 뉴욕의 거리를 배회하며 길거리에 낙서를 하던 흑인 청년은 어떤 부류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태생은 풍요로움의 예술을 보여주는 예술가가 될 뿌리를 갖고 있기보다 고통과 갈망의 예술을 보여주는 예술가가 될 뿌리를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의 무대는 국립미술관이나 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갤러리가 아니라 비천한 길거리 담벼락이었고 그의 화구는 몇백년이 지나도 탈색되지 않는다는 비싼 유화물감이 아니라 공업용 스프레이 페인트와 분필조각 따위였다. 그렇게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흑인 청년이 제멋대로 휘갈긴 낙서들이 어떻게 세계적인 걸작이 되고 그가 현대 미술계의 슈퍼스타로 급부상하게 되었을까

그는 정말 숨은 진주, 불세출의 천재였을까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 가운데 가장 얼빠진 것을 꼽으라면 현대미술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한심하고 허위에 가득 찬 예술은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할 일이 없어져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적유희를 하다가 제풀에 가속도가 붙은 나머지 심지어 똥도 사고파는 짓까지 하게 된다(피에르 만조니라는 작가는 자신의 인분을 깡통에 담아 ‘예술가의 똥’이란 제목으로 팔았다). 한번은 ‘제3세계에서 온 젊은 미개인 전’이란 제목의 전시회가 함부르크에서 열린 적이 있었는데 그 작품에 대해서 수준높은 감상자들과 명망있는 비평가들이 모두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전시회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몰래카메라를 위한 속임수였고 그들이 찬미한 그림은 두 마리의 침팬지에 의한 페인트 범벅일 뿐이었다. 바스키아는 바로 ‘그들’이 보고 싶어했던 ‘제3세계에서 온 젊은 미개인 전’에 딱 들어 맞는 실존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서 천재적 예술가로 추대받기에 이른 것이다. 침팬지가 그린 그림보다야 그래도 비싸게 팔 수 있지 않겠는가. 80년대 뉴욕의 예술 애호가들은 잘 조련된 혈통좋은 애완견 같은 예술가들에게 따분함을 느꼈던지 야생동물 같은 바스키아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정말 야생동물과도 같아서 그 풍요를 누리기는커녕 시름시름 앓다가 곧 죽어버렸다.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www.hshban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