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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악사들, 삶을 연주하다
2001-04-25

닝잉 감독의 <즐거움을 위하여>

才戈 樂 1993년, 감독 닝잉 출연 한종라우

EBS 4월28일(토) 밤 10시

<즐거움을 위하여>는 여러 면에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연상시킨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음악에 몰두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것은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후자가 쿠바의 대중음악을 연주하며 나이먹은 장인들에 관한 영화라면, <즐거움을 위하여>는 아마추어라는 점이 차이랄까. 게다가 이들이 골몰하는 분야는 중국 전통연희인 경극이다. 중국의 여성감독 닝잉은 요란하고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노인들 협연을 별다른 드라마의 개입없이 담아내고 있다. 중국 5세대 감독 첸카이거가 <패왕별희>에서 경극이라는 소재를 탐미주의에 경도되어 담아낸 데 비해 닝잉 감독은 대상으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닝잉 감독은 정치적인 메시지나 역사에 관한 피해의식 없이, 영화를 통해 ‘도회적 리얼리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중국 6세대 감독들의 물결에 섞여 있는 듯 보인다(감독 자신은 5세대의 막내를 자처하지만).

베이징 시내의 어느 극장에서 일하던 한은 어느덧 퇴직을 맞이한다. 짐을 꾸려 거리로 나선 그의 발길은 공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는 한의 동년배 노인들이 경극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아마추어에 불과한 노인들의 연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한은 그들을 훈련시킬 것을 결심하고 혹독한 교육을 준비한다. 하지만 예술대회에 출전했다가 낙선한 것을 계기로 팀에서 한은 고립되기에 이른다. 연습장소마저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즐거움을 위하여>는 여러모로 감독의 전작 <민경고사>를 닮았다. 주로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해서 다큐멘터리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펼쳐가는 품새가 특히 그렇다. 분명히 사실주의의 맥락을 따르고 있는 이 영화는 베이징이라는 도시의 정갈함을 카메라로 담아낸다는 점에서 서정적 리얼리즘영화라고 분류해도 좋을 것이다. 중국판 <뜨거운 것이 좋아>라고 칭할 만한 데뷔작 <하필이면 나를 사랑한 사람>의 그림자도 보인다. 감독은 장르 어법에 의지하면서 개인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영화는 경극에 관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다. 실제로 무대에서 공연하는 장면보다 무대 뒤 연습과정에 훨씬 많은 비중이 두어지기 때문이다. 기본기를 갖추지 않은 노년들 실력도 훌륭한 편은 아니어서 이따금씩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적인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동작 둔한 악사들의 연습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우습고 한편으로는 측은하다.

영화에선 국가간부였던 호안이라는 인물이 경극의 한 배역을 맡고 있는데 별 마찰없이 단원들과 어울린다. 이같은 정치적 중립성 탓인지 닝잉 감독은 중국 정부의 간섭이나 통제없이 연출활동을 지속한 편에 속한다. 닝잉 감독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 관해 발언하는 방식으로 과거 세대와 ‘절연’하고 있지만, 비판의식 역시 수축되어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민경고사>에서 맨얼굴을 드러내던 베이징이 <즐거움을 위하여>에서는 수려하기만 하다. 혹시, 중국의 풍경 자체를 극히 ‘이국적인 것’으로 타자화하던 선배 감독들의 노선에 합류하려는 건 아닌지.김의찬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