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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국] 글 쓸 틈 없는 새해를 꿈꾸며
2003-01-29

겁없이 영화제작 하겠다고 나서던 무렵, 영화 만드는 일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똘똘한 감독만 준비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지레 기가 꺾일 만한 무시무시한 현실의 벽에 대해서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순진하게도 시나리오 좋고 믿음 가는 감독이면 돈도 모이고 배우도 줄을 서리라 생각했다. 오죽했으면, 나이는 어리지만 제작자로는 선배격인 어떤 이로부터 ‘형은 룸살롱 접대하지 않고 영화 잘 만들 수 있을지 두고보자’는 질책성 조언까지 들었다. 영화쪽에도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는 충고였던 셈인데 나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한술 더 떠 이런저런 구태에도 정면으로 부닥치고, 이른바 제작시스템도 획기적으로 바꿔보리라 의기충천해 있었다.

이 칼럼을 쓰면서도 나름의 그런 문제의식을 피력하려고 애를 썼다. 공감을 표시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작 참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는 걱정도 꽤나 들었다. 현실을 도외시한 탁상공론이라거나 태생적 불평주의자의 투덜거림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여전히 준비 중’인 신참 제작자 눈에 비친 현실은 아직도 그리 부정적이지 않다. 룸살롱에서 접대를 하며 일을 도모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큰 장애로 불거진 적이 ‘아직까지는’ 없기 때문이다(룸살롱에 갔다면 더 쉬웠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오랜 관행과 이해관계에 얽힌 커넥션을 무시하고 주류 시장에서 영화 만드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긴 싫지만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로 확인한 것은 속이 쓰린 일이다.

지난주 심재명 대표의 고별사가 예고한 대로 나도 이 칼럼을 쓰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이다. 거창한 출사표까지 쓰고 시작했지만 그동안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 ‘박수 쳤다고 치기’에도 낯이 간지럽다. “한국영화 제작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중에서 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편파적인’ 목소리를 더하고 싶다”고 해놓고는 좀더 편파적이지 못해서 아쉽고, “취향이든 감성이든 평균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별종으로 치부되고 소외받는 사람과 이들의 세상살이를 적극 지지하고 옹호할 작정”이라고 해놓고는 ‘주류’에 대한 짝사랑을 감추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주목받지 못하는 현안이지만 외면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꼭 좀 쓰라고 ‘청탁’했던 분(주로 독립영화계나 제도권 밖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사연과 주장을 다 전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도 크다.

이런저런 날선 글을 쓰다보니 적잖게 눈총을 받거나 욕을 먹기도 하고, 심지어 멀쩡하던 관계가 껄끄러워진 사람까지 있다. 나이 들수록 대하기 불편한 사람 수가 많아지고, 적이 는 것 같아 가끔 기분이 씁쓸해진다.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30대 중반까지는 그리 큰 욕먹지 않고 살았던 것 같은데, 영화제작 하겠다고 나서고 이 칼럼을 쓰면서부터 박수보다는 야유를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모두가 부덕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부디 올해는 영화 만드느라 글 쓸 시간도 없으시길.”새해 벽두, 몇분과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새해인사를 주고 받았는데, 박찬욱 감독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뜨끔했다. 그동안 명색이 제작자인데 주로 “<씨네21>에서 글 잘 읽고 있습니다”라는 인사만 듣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머지않아 지겹도록 오래 주물러온 시나리오 작업을 마무리하고 제작에 착수할 예정이다. ‘영화 잘 만들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말만 믿고 최선을 다해 보겠다.

10년가량 제 이름 달고 기사 써서 밥벌이하다가 덜컥 영화제작 하겠다고 나섰을 때 예기치 못한 ‘금단증세’가 꽤나 강렬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칼럼을 쓰는 동안에도 2주일에 한번씩 돌아오는 마감을 끔찍해하면서도 글쓰기와 마감의 긴장감을, 쑥스럽지만 은근히 즐겨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한동안 맛보게 될 새로운 금단증세가 어떤 느낌일지 사뭇 기대된다.그동안 미천한 글 실어주신 <씨네21>에,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한다.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 kookia@jowoo.co.kr

(그 동안 본업이 아닌데도 귀한 글을 써주신 심재명·조종국 대표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음호부터는 이승재 LJ필름 대표와 시나리오작가 겸 배우 김해곤씨가 번갈아 이 코너를 맡습니다. 계속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