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무사> 후반작업 현장
2001-04-26

소리의 날개 입고, 역사여 거듭나라!

■ <무사>의

사운드작업 현장, 시드니에 가다

적도를 지날 때는 안내방송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비행기는 남반구에 있는 거대한 섬,

호주의 남쪽 끝에 이르렀다. 시드니, 오래 전 지리 시간에 세계 3대 미항 가운데 하나라고 일러준 그곳은 4월의 햇살이 눈이 부셨다. 푸르고

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 곧게 뻗은 길과 장난감처럼 예쁜 집들이 11시간 비행의 피로를 금방 씻어간다. 공항에 마중나온 <무사>

제작부장 최정화씨가 제작진이 한달 전부터 이곳에서 작업중이라고 일러주자 ‘오, 이제 제작진이 지옥을 떠나 천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4달 전 중국 씽청의 토성 촬영현장을 찾았을 때가 새삼 떠오른다. 히말라야 등반대처럼 눈, 코, 입만 내놓고 두터운 옷을 입은 채 펭귄처럼

걷던 제작진들, 그들은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곤함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새옹지마라고 했나? 영하 20도를 넘는 강추위를 견디며 밤새 영화를

찍던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 태양이 뜰 때 기지개를 켜며 바닥이 맑게 드러나는 남국의 바다를 보며 아침을 맞고 있는 것이다.

편집에만 5주,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바다가 한강처럼 도시의 절반을 가르는 시드니, 하버 브리지를 건너자 스탭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 다다른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후반작업 때 스탭들이 묵었던 곳이라는 여기 아파트에서 내려다 보면 햇살에 반짝이는 시드니 앞바다의 풍광이 그대로 들어온다.

세상일이라는 게 묘해서 중국 씽청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 ‘안쓰러워 못 보겠다’ 싶었는데 이젠 ‘부럽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런 감상이 오래

가진 않았다. 그간 고생한 얘기며 쉴 틈 없는 일정을 지켜보노라면 어디에서 일하든 영화란 늘 한계상황과 싸우는 수십명의 피와 땀이 낳은 산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후반작업이란 것도 그렇다.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5달간 하루 2∼3시간씩 자며 때론 사막의 불볕더위와 때론

시베리아산 북풍과 싸워 만든 화면들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소리가 입혀지는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로 나온다. 중국에서 찍은 30만자 필름이

바다에서 갓 잡아올린 먹음직한 물고기라면 요리사의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1월 김현 편집실에서 진행된 편집작업은 30만자 필름을 아비드

편집기에 입력하는 데만 1달이 걸렸다. 2월부터 김성수 감독은 꼬박 5주 동안 편집작업에 매달렸다. 연출부가 밤새 스크립트를 정리해놓고 감독은

아침부터 밤까지 작업을 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무사>처럼 커트 수가 많고 촬영한 분량이 방대한 영화는 편집작업도 일반영화보다 몇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개봉일정에 맞추느라 데뷔작 <런어웨이>의 후반작업을 6일 만에 끝내야 했던 김성수 감독에게 편집에만 5주가

걸린 <무사> 후반작업은 어떤 의미일까? “감독 입장에서 누구나 하고 싶지만 제작여건 때문에 못하는 게 많다. 후반작업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고 조금이라도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시도했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못했던 전위적인 작업을 모색한 셈이다.”

홍콩에서 시드니까지, 전문성 찾아 지구 한바퀴

사실 <무사> 제작진을 지구 반대편으로 이끈 것도 전위적 작업에 대한 유혹이다. 시드니 북쪽 린필드에 있는 ‘사운드록 사운드디자인’(이하

사운드록)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 등 한국영화 몇편이 후반작업을 했던 녹음 스튜디오. 연출부, 제작부 합해

7∼8명이 작업하고 있는 이곳에서 <무사> 녹음과 믹싱은 물론 스퀴즈와 프린트 만들기가 진행된다. <무사> 프로듀서인

조민환씨는 호주 작업을 택한 이유로 스퀴즈와 사운드디자인 능력을 든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필름 스퀴즈 작업인데 스퀴즈는 수퍼35렌즈로

찍은 필름을 압축해서 사운드트랙이 들어갈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무사>는 시네마스코프 사이즈(가로세로 비율이 2.35 대 1)로

보여지는 영화인데 35mm필름으로 찍은 영화를 시네마스코프로 영사하자면 35mm필름의 사운드트랙까지 찍은 화면의 가로를 압축해줄 필요가 있다.

이런 스퀴즈를 할 수 있는 곳이 미국, 일본, 호주인데 <공동경비구역 JSA>가 일본을 택한 반면 <무사>는 호주로 왔다.

스펙터클을 보여주기 위해 가로비율이 큰 화면을 택하는 게 대작영화의 일반적 경향이라 스퀴즈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무사>는 참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찍은 영화다. 슬쩍 김성수 감독에게 “이번 영화 덕에 중국도 가고 호주도 가고 그러네요”라고

말하자 “중국, 호주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처음 <무사>를 준비할 때는 홍콩에서 배우 오디션을 봤고 영화음악을 녹음하느라 도쿄,

바르샤바, 런던을 거쳤다. 다국적 프로젝트, 제작진은 <무사>에서 그런 의미를 찾고자 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국적을 불문하고

모여 영화를 만든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있고 배울 게 많은 시도 아닐까요.” 그의 말처럼 중국 씽청에서 본 미술감독 후팅샤오가 설계했다는

토성은 입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곳을 다녀간 박광수 감독이 <이재수의 난> 때 중국 미술팀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하고 아쉬워했다는

게 빈말 같지 않았다. 그들이 만든 토성은 수백년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소리의 옷을 입고 4차원 시공간으로

호주 사운드록에서 제작진이 기대하는 것도 그런 유의 전문성이다. 한달 전부터 이곳에서 진행한 작업은 영화에 들어갈 수많은 소리를 녹음하고 갈라내고

정리하는 작업이다. 사실 영화하면 소리보다 화면이 먼저 떠오르는 게 일반적이지만 소리를 만들고 다듬고 모으는 사운드디자인은 촬영 못지않게 중요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눈을 감고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스타워즈>의 주제가를 들어보라. 광활한 우주공간과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이

떠오르는 것은 소리가 일으키는 연상작용이다. <죠스>의 심장박동 같은 효과음은 어떤가. 무시무시한 상어의 어금니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가. 사운드디자인을 통해 영화는 놀라운 입체감을 얻는다. 필름에 새겨진 2차원 공간은 소리가 덧붙여짐으로 인해 3차원의 현실감을 얻는다.

<무사> 같은 역사물에선 한 차원 진화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시간, 가공의 역사는 촬영현장에서 묻혔던 소리를 재생, 확대하는 과정에서

4차원의 시공간으로 거듭난다. 칼과 갑옷, 창과 방패, 말과 사람, 술잔과 벽, 불과 화살이 만날 때 과연 어떤 소리를 낼 것인가. 절반쯤

발명가의 심정으로 이곳 사운드디자인팀은 실제 소리와 가공의 소리를 섞어 효과음을 만들어낸다. 대사도 그렇다. 현장에서 동시녹음된 대사를 인물별로

정리해서 어떤 대사는 크게, 어떤 소리는 작게 조절한다. 영화가 그럴 듯한 거짓말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이상 이런 작업은 불가피하다. 김성수

감독은 <무사> 사운드디자인의 핵심을 “사실적”인 데서 찾는다. 홍콩 무협영화로 익숙한 과장된 효과음이 아니라 실제 전투현장에서

있을 법한 소리 위주로 사운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제작진은 촬영할 때 쓴 칼, 창, 활, 갑옷 등 소품 일체를 이곳에 옮겨와 갖가지 마찰음을

녹음했다. 실제 영화에는 촬영현장에서 동시녹음한 소리가 훨씬 많이 쓰이지만 후시녹음한 대사와 효과음이 현장에서 채울 수 없던 공간을 메운다.

“풍성하고 두터운 공간감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무사> 제작진이 멀리 호주까지 와서 기대하는 바이다.

김성수와 사기스 시로의 만남, 만족도 100%

소리 하나하나를 귀기울여 듣고 장면별로 필요한 소리를 찾아내는 사운드작업을 지켜보노라면 생명탄생의 순간을 목격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건

일종의 숨결이다. 굳어 있던 화면에 효과음과 대사가 들어가면서 영화가 숨을 쉰다. 필름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아장아장 걷고

말을 배운다. 그가 성인이 되는 길목에 놓인 또다른 통과의례는 음악과 만나는 일이다. <나디아>와 <신세기 에반겔리온>에서

안노 히데야키의 파트너로 영화음악을 맡았던 사기스 시로는 <무사>에 쓰일 곡을 완성해 4월16일 시드니로 찾아왔다. 그는 지난 1년간

<무사>를 위해 50여곡을 만들었고 한달 전 도쿄와 바르샤바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녹음했으며 런던의 스튜디오에서 믹싱을 한 뒤 마침내

완성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사기스는 김성수 감독을 만나자마자 사운드록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들려줬다. 10시간 넘는 비행을

하고 쉴 틈도 없이 <무사> 제작진과 조우한 그는 전혀 피곤한 기색없이 음악을 듣는 감독의 표정을 살폈다. 바르샤바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때 현장에서 이미 들었고 지난 몇개월간 꾸준히 화면과 음악을 주고받았지만 완제품에 대한 감독의 평가를 기다리는 사기스는 흥분한 듯 보였다.

애절한 관악기와 현악기의 조화, 에너지가 넘치는 북소리, 바르샤바 오케스트라의 연주라고 믿기 힘든 동양적 정서의 선율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지자

6백여년 전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사막을 건너고 몽고 기병들과 싸웠던 고려 무인들이 칼과 창의 춤을 보여준다. 감독과 음악가는 서로에게 고마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이건 제 음악이 아닙니다. 김성수의 음악이죠.” (사기스 시로)

“100% 만족해요. 사기스 같은 예술가와 일한 건 멋진 일이죠.”(김성수)

시드니를 떠나기 전날 밤, 김성수 감독은 “부럽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배우 정우성, 프로듀서 조민환, 촬영 김형구, 조명 이강산, 무술

정두홍, 특수효과 정도안 등 김성수 사단에 미술 후팅샤오, 음악 사기스 시로 등 중국과 일본의 전문가들이 더해졌으니 인복을 타고났다는 말이다.

그에 걸맞은 재능과 책임감이 요구되긴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 오가는 현장에서, 혹한과 허기와 졸음은 각오할 만한

것이 된다. <무사>의 대장정은 이제 막바지다. 5월까지 호주에서 사운드작업을 마치고 6월 초에는 프린트를 완성한다. 지난해 8월

촬영에 들어가 올해 7월 개봉까지 꼬박 1년의 강행군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무사> 제작진이 진기한

경험을 한 건 분명하다. 그들은 세상의 끝과 끝을 오가며 이번 영화를 만들었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격려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시드니=글 남동철 기자 사진 손홍주 기자

▶ <무사>

후반작업 현장

▶ 김성수

감독 인터뷰

▶ 사기스

시로 영화음악 프로듀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