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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영의 오!컬트,<결혼피로연>

부모님 손바닥 위에서 나이먹기

내 사촌동생은 얼굴은 조폭인데 웃으면 눈이 빙긋이 초생달처럼 그어지는 아주 매력적인 촌놈이다. 마치 만화 <엔젤전설>에서 ‘키야약’ 소리를 지르고 ‘친구 100명 만들기가 소원’인 주인공처럼 얼굴은 험상궂어도 마음속엔 소녀가 앉아 있는 녀석이다. 그 녀석이 휴학하고 군대지원서 내고 집에 내려가기 전 며칠 우리집에 머물렀다.학교 다니며 다니던 회사의 병역특례를 기다리다가 회사사정이 안 좋아져서 그냥 군대에 지원서를 낸 것이다. 말이 집이지 결혼도 안 한 30대들이 우글거리는 우리 형제들에게 20대 초반의 이 생생한 녀석은 벌써부터 암울한 미래가 감염되기 시작한다. 수칙1) 방엔 아무도 들어가서 자지도 않고 모두 거실에서 함께 잔다.수칙2) 밤마다 시작되는 우리끼리의 술마시기에 동참…. 수칙3) 텔레비전 보면서 자기 멋대로 욕하기. 수칙4) 절대로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느덧 이녀석은 우리의 행각에 넌덜머리가 나는지 술 좀 마시지 말라며 뜯어말린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는 자신의 아버지(즉 나에겐 삼촌이시다)가 술 만날 마시는 것 때문에 괴로운데 이 집은 왜 이러냐 하면서… 진저리를 친다….

그 삼촌이란 분은 잘 나가는 대기업을 다니다가 어느 날 복어조리사 자격증을 턱 따시고 지방에서 복집을 하면서 손님들과 대작하며 사시는 술꾼 삼촌이시다. 그 삼촌이 웬일인지 양복에 서류가방을 들고 올라오셨다. 입사동기들이 이제 모두 사장이 되었다 하시면서 친구도 만날 겸 올라오신 거란다. 마침 아버지 제사도 끝내고 함께 음복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삼촌이 나를 앉혀두고 김치담그기 강의를 하신다. 동치미는 말이지 소금 위에 무를 굴려야 한다는 등….여하튼 투박한 삼촌의 김치담그기 강의를 열심히 들으며 과연 삼촌은 안정된 회사원보다는 요리사란 직업을 좋아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때 양복에 맞춰 들고 오신 서류가방을 여시더니 “옛다, 내가 콩이파리 무쳐서 들고 왔다”(경상도는 깻잎보다 콩잎을 더 많이 먹는다)며 주신다.“앗! 삼촌 이 서류가방에 뭔가 대단한 게 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어데, 너희 반찬 하라고 이거랑 내 양말밖에 없다, 마….” 하하 이런 아버지를 어떻게 술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난 웃으며 삼촌이 자신의 아들, 컴퓨터 병역특례 자리가 있는지 물어보러 10년 만에 사장이 된 옛 동료들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해보았다. 리안 감독의 <결혼피로연>에서 마지막에 영어로 말하는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 멋진 장면. 동성애 커플이 대만에서 오신 부모님 앞에서 가짜 결혼식을 하고 그 해프닝 속에서 그들은 부모님 앞에서 영어로 싸운다(물론 대만에서 오신 부모님은 당연히 영어를 못 알아들으실 거라 생각하고). 물론 부모님은 못 알아들으신 표정을 짓고 계신다. 자기가 게이라고 밝히는 아들에게 “아버지에게는 얘기하지 마라, 돌아가실 거다”하고 받아들이는 어머니 반응과 달리 아버지는 아들의 실제 파트너인 남자와 조깅을 하다가 이 며느리(?)에게 선물을 주며 “나 영어 조금 하네” 그런다. 늙은 아버지를 잘 그리는 리안의 죽이는 저 솜씨….

자식들은 부모가 자기를 이해 못하고 부모들은 왜 이리 고집불통인가 해도 부모들은 사실 다 알고 있다. 삼촌 서류가방 속 양말과 함께 싸온 ‘반찬’ 선물처럼 은근히 우리에게 생활의 냄새를 풍긴다…. 인생에 대해 안다고 말하지 말라며 말이다…. 삼촌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새해엔 술 조금만 드세요.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 sicksadworld@orgi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