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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기억일 뿐이다(1),<토탈 리콜>

생을 되돌아보기에는 아직 한창 젊은 나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내 나름대로 크고 작은 산들을 넘었으며 또 크고 작은 파도들을 헤쳐며 살아왔었다. 고단한 언덕길을 의지와 인내로 극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말 어느 노래 가사처럼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무릎이 꺾인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역경들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살아 있고 그런 역경들 사이사이 주어진 작은 기쁨과 행복들은 삶에 충실했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기고 좋아했다. 그리고 또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열심히 살고, 안전벨트도 매야 하고 저축도 해야겠고, 새로운 꿈을 키우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사에서 회한도 있고 자부심도 있고, 후회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모두들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경영했으니까. 영화화될 정도는 아니어도 모두들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유감없이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정말 지나간 모든 과거의 역사들이 모두 나의 의지에 따른 결과였을까? 그리고 다가올 미래 역시 내가 하기에 달린 것일까? 정말 그럴까?

점성학, 사주팔자, 관상, 혈액형, 손금, 발금, 토정비결 등등 인간의 운명을 설명해주는 역학들을 통해서 내 지나온 삶의 궤적들을 마치 비디오로 출시된 걸 보고 얘기하듯이 척척 맞추고 심지어 내가 모르는 사실까지 알려주고 미래까지 맞추어버리면 그 허무함에 무릎에 꺾이고 만다. ‘내가 한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로 돼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주는 허무함이다. ‘원래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운명’이란 얼마나 맥빠지는 일인가. 이를테면 죽도록 사랑한 연인과 헤어져 슬퍼하고 자책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겨우 절망을 딛고 일어섰는데, 사실 그 연인과는 원래 헤어질 운명이었다면 그 헤어짐은 슬퍼할 가치가 있는 사건인가? 예정되어 있는 일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을 터. 당신의 모든 희로애락 생로병사가 이미 ‘운명’지어져 있다면 당신은 무슨 기쁨으로 살아갈 것인가. 운명이란 이름 앞에서 우리가 이렇게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부분은 ‘운명이란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지만 자신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라는 단서를 슬그머니 끼워넣는다. 아무래도 인생이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뜻대로 끌고 나가야 살맛이 날 테니까.

하지만 정작 문제는 나의 인생사 중 대체 어느 부분이 운명을 넘어 내 능력으로 경영한 삶이며, 어디서부터 나의 의지에 의해서 예정에 없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인생항로가 변경되었냐는 것이다. 혹은 변경되기라도 했느냐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을 따라 그대로 살아온 것은 하나의 영화와도 같은 것이고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운명을 거부한 삶을 진짜 나의 삶이라고 한다면 지금 나는 진짜를 살고 있는 걸까 시나리오대로 살고 있는 걸까.

영화 <토탈 리콜>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영화를 아무리 주의깊게 관찰하면서 봐도 대체 어디까지가 주인공 퀘이드(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실생활이며 어디서부터가 ‘리콜’사에서 주입해준 기억여행을 위한 가상현실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첫 번째 함정은 퀘이드가 리콜사를 찾아가서 기억이식을 받는 시점부터가 가상현실이라고 보기 쉬운데 <토탈 리콜>은 그렇게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토탈 리콜>의 섬뜩함은 스펙터클 모험 가득한 영화 전체가 ‘리콜’사에서 이식해준 기억여행에 의한 상황이며 진정한 현실세계는 단 한컷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영화 곳곳에 시시때때로 주인공은 그 가상현실에서 뛰쳐나오고 거부하고 자신에게 이식된 기억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자신에게 기억을 주입시킨 조직과 사투를 벌인다. 그리고 끝내 진정한 자신의 삶을 되찾는다. 그러나 그 거부의 사투와 진정한 삶을 찾는 과정조차도 주입된 기억일 뿐이다. 토탈 리콜.___다다음주 이시간에 계속.김형태/ 황신혜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