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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민중, 웃음의 배를 불리다
2001-05-02

심우섭 편 9 잇달은 영화의 성공으로 흥행감독이 되다

청년 시절부터 시를 읽고 또 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급기야 영화의 주제가 가사를 직접 짓기에 이른다. <청춘사업>의 주제가 역시 가슴속에

오래도록 담겨진 한편의 시가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노래를 불러준 심성호의 목소리도 좋았다. <청춘사업>과 <주책바가지>가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나는 새로운 코미디 형식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뮤지컬과 코미디와의 배합이 그것이었다. <청춘사업>의

김문엽이 다시 펜을 잡고 <폭발 일초전>이라는 이름으로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각본이 끝나기 전부터 제목이 검열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존재해왔다. 아니나 다를까 촬영을 마치고 심의를 받는데 영화이름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즐거운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극장에 걸 수밖에 없었다. 단지 ‘폭발’이라는 말이 들어간 이유로 영화가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건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즐거운 청춘>(1968)은 또다른

신기록의 행진을 의미했다. 뮤지컬의 형식의 취하다보니 무엇보다 영화음악이 돋보여야 했는데, 영화에 삽입될

30곡 이상의 사운드 작곡을 맡은 사람은, 19살의 나이에 동아방송에서 주최한 콩쿠르에서 작곡상을 수상하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신예 정민섭이었다.

그는 김상희나 김상진 등 인기 가수들의 노래를 만들어주며 무서운 기세로 떠오르던 중이었다. 하지만 영화음악의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는

이 영화로 한국영화 최초의 뮤직디렉터 직함을 얻는다. 그 전에 신상옥 감독의 <꿈>(1955) 등의 음악을 맡은 김성태나 이병일

감독의 <시집 가는 날>(1956)의 임원식, 그리고 홍성기 감독과도 오랜 친분을 자랑한 김동진 등 쟁쟁한 영화음악가가 많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음악감독’의 타이틀을 달지 못했다. ‘최초’의 수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타고난 춤꾼 트위스트 김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는다. 지금 우리에겐 노래부르는 그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지만, 당시 그는 춤에는 일가견이 있을지언정 노래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그를 위해 정민섭은 그의 보이스코드에 맞는 노래, 말 그대로 ‘그만의 노래’를 만들어준다. 그때 갈고닦은 노래 실력은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인기가 급상승한다.

트위스트 김 아니 가수 김한섭의 뒤에는 그렇게

정민섭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 최초의 코믹뮤지컬 시도가 나를 들뜨게 했고, 스탭들과의 안정된 호흡으로 만들어지는

격렬한 무대가 나를 흥분시켰다. 가수 김상희, 김세레나, 이정자, 자니 지, 양미라 등이 총출동했고, 윤관식의 소리(唱)도 한몫을 더했다.

영화는 대성공했고, “심우섭과 작업하면 무조건 웃고 돌아간다”는 소문이 번졌다. 나와 일한 제작자들은 하나같이 주머니를 불려서 돌아갔다.

그저 잘되게 해줘서 고맙다는 소리가 좋았을 뿐이었다. 내 몫으론 얼마가 떨어지든 별로 신경쓰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다만 스승 홍성기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 일말의 죄책감은 있었다. 스스로 흥행감독이 되길 원한 바는 아니었으나 작품을 의뢰하는 제작자들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을 주고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코미디가 내겐 맞았다. 지금은 브라운관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뒤 스크린에 진출하는

배우들이 많지만 60년대는 그 반대였다. 스크린을 통해 데뷔한 생짜 배우들이 영화연기를 몸에 익히고 인기를 등에 업고나서야 비로소 브라운관에

얼굴을 들이밀 자격이 생기던 시절이었다. 쇼무대에서 활동을 해오던 배우들도 영화를 거치고나면 몸값이 뛰었다. 구봉서, 서영춘, 양훈, 오부자

등이 그런 케이스인데 어려운 시절 배고픈 민중을 웃겨주던 코미디 배우들의 존재는 참 반가운 것이었다.

구술 심우섭/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 <운수대통> 등 연출

정리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