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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나무
성석제(소설가) 2003-03-12

박정희 기념관 건립 기한이 내년 10월까지 연장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지난해 여름에 강원도 어느 산골에 갔다가 본 울창한 산림이 생각났다. 하룻밤을 묵게 된 그 집 뒤꼍 산자락에 쭉쭉 곧게 뻗은 낙엽송이 하늘을 가릴 듯 서 있는 것이 절로 찬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나무가 서 있는 산은 국유지요 숲은 국유림이었다. 그때는 그 나무의 이름을 잘 몰라 집주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는 그 나무가 낙엽송이라고 하면서도 그 근처 사람들은 그 나무를 ‘박정희 나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래서 수수께끼가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물론 전 대통령 박정희를 이른다. 낙엽송이 소나뭇과에 속하기는 해도 늘푸른나무가 아니고 말 그대로 겨울이 되면 낙엽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권불십년, 아니 십팔년의 무상을 박정희가 보여준 것에 비유해 나무에 그런 이름이 붙었는가. 집주인은 물론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박정희 특유의 압축성장 정책이 산림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그런가. 우리의 환경과 민족의 품성에 맞는, 또는 소나무와 참나무 같은 재래 수종은 버리고 외래의 수종을 선택한 결과 그게 낙엽송이 된 것인가. 그와 유사한 것이 새마을운동이며 박정희가 지은 <새마을 노래>에도 나오듯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한다면서 누천년 내려온 토목건축의 전통, 자연과 어울리는 풍경을 원수라도 되는 듯 싹 일소해버리고 “너도 나도 힘써서” 슬레이트와 시멘트길로 도배해놓은 게 아니겠느냐. 그는 맥락이 닿는 것 같긴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 반쪽의 진실이 허위와 결합될 때 최악의 거짓이 된다는 누군가의 명언을 인용하며 내 직업병이 중증이라고 나를 약올렸다.

노래라는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박정희가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 공원>이라도 애창했던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이 노래에 나오는, 낙엽송에 새긴 이름이 박정희라도 되느냐. 나의 광분에 그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낙엽송은 사전에 의하면 건축·침목·펄프·선박 따위에 쓰인다고는 하지만 막상 시골 가정집에서는 쓸모가 별로 없다. 이 나무의 목질이 고약스러워서 건조과정에서 걸핏하면 뜨고 비틀어진다는 것이다. 통나무집을 짓는 건축현장에서는 이런 낙엽송의 성질을 감안해서 조심스럽게 시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땔감으로나 쓰려고 장작으로 팰 때 도끼날이 박히면 좀처럼 빠지지 않도록 질깃질깃하여 도끼자루깨나 잡아먹는 게 낙엽송이다. 그게 박정희의 생애와 성격을 일부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이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이냐. 내가 생각해도 그럴 리는 없었다.

그에 의하면 낙엽송, 일명 일본잎갈나무가 박정희 나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박정희가 시찰을 다니다가 민둥산을 보면 화를 내는 바람에 낙엽송을 심어댔고 그때부터 낙엽송이 박정희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의 ‘성질머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정희 정권 시절에 전국 산림에 80% 이상이나 되는 식재가 이루어졌다는 통계가 있다. 그 당시 산림담당 공무원들은 최대한 빨리 자라고 대나무처럼 곧게 뻗어 외양만 그럴싸해 보이는 낙엽송이 각하가 가시는 길마다 숲을 이루도록 심고 또 심고 또 심었다. 이제 산림의 양보다 질을 추구해야 할 참에 전시용으로 보이기 위해, 문책을 모면하기 위해 급히 심었던 낙엽송은 없는 데가 없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강원도 곳곳의 산에 군림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그의 시대는 길었다. 그리하여 전국 곳곳에 있는 명승고적의 현판과 기념탑과 비석의 글씨는 물론이고 오지의 숲과 나무에까지 그의 손길과 입김이 미치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특히 불후하여 오래갈 것들, 거듭 태어나는 생명에 새겨진 그의 위명, 악명이 어느 세월에 떨어져나갈지 모르겠다. 이런 판국에 굳이 새로 돈을 들여 기념관을 세울 필요까지 있을는지.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