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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 프로듀서 3인전(傳)-하비 웨인스타인 [1]
김혜리 2003-03-14

“할리우드에서는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

<갱스 오브 뉴욕>의 하비 웨인스타인, <디 아워스>의 스콧 루딘, <매트릭스 레볼루션>의 조엘 실버, 이들 3인의 프로듀서는 오랫동안 할리우드에서 일했지만 올해만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은 없다. 지난해와 올해, 그들은 각자 일생 최고의 프로젝트라 할 만한 영화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지만 그리 많은 나이 차가 나지 않는 그들의 경력에는 몇 군데 겹치는 지점도 있다. 하비 웨인스타인과 스콧 루딘은 <다 아워스> 등의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고, 스콧 루딘과 조엘 실버는 로렌스 고든 밑에서 프로듀서 일을 배웠으며, 세 사람 다 유대인이다. 또한 그들은 불같은 성격에 저돌적인 스타일로 일하는 프로듀서들이다. 목표를 향해 전진할 뿐 퇴각을 염두에 두지 않는 그들은, 어쩌면 그래서 할리우드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에너지의 밑바탕에는 그들 각자가 이상으로 품었던 영화를 만들려는 끓어오르는 창작의 열망과 강렬한 의지가 있다. 2003년을 최고의 해로 만든 이들 3인 프로듀서의 성공 비밀을 들어보자. - 편집자

헐크같은, 때론 너무 살떨리는

<갱스 오브 뉴욕> <시카고>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Harvey Weinstein)

2000년 선댄스영화제에 모여든 독립영화인들은 기묘한 정적을 느꼈다. 그해 파크 시티에는 뭔가 빠져 있었다. 이 시원섭섭한 허전함의 원인은 미라맥스의 구매와 대외 활동을 총괄하는 대표 하비 웨인스타인(51)의 결석. 미라맥스의 선댄스 구매 규모는 이미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가 박테리아성 질환에 걸려 앓아 누웠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파크 시티에는 암 운운하는 추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한 라이벌 스튜디오의 간부는 이때 분위기를 가리켜 “마치 옛 소련의 안드로포프 사망설이나 옐친 와병설을 연상시켰다”고 재치있게 표현한다.

미국 독립영화계의 권위자

거기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을 조성하는 미국 독립영화계의 권력자이자 인디 배급사 미라맥스를 7대 메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니 스튜디오로 키운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2002년은 특별히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다. <스파이 키드2>를 빼면 돈을 번 영화도 없었고, 75명의 직원을 감원했다. 그러나 지난 2월 아카데미가 2003년 오스카 전초전에서 미라맥스 영화에 반세기 동안 유례없는 무려 40개 후보 지명(공동제작 <디 아워스>를 제외하면 31개)을 안겨주자 “상도 좋지만 밥벌이도 해야지”라고 꼭 집어 빈정댔던 영화인들조차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할리우드의 화제는 이내 웨인스타인이 이번 노미네이션을 받은 작품을 어떻게 주물럭거렸는가에 대한 에피소드로 옮아갔다.

퀸즈 출신의 형제 하비와 밥 웨인스타인은 1979년 미라맥스를 설립했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회사를 차린 형제는 효자답게 어머니의 이름 미리엄과 아버지의 이름 맥스를 합쳐 회사 간판을 정했고 록 콘서트를 프로모션하고 작은 영화들을 배급했다. <트위스트 앤 샤우트> <정복자 펠레> 같은 조그만 성공작을 내며 1980년대 내내 천천히 성장하던 미라맥스는 <스캔들>을 제작한 1988년 당시 영국 미들랜드 은행으로부터 500만달러를 투자받고 1989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북미 배급권을 110만달러에 사들여 2600만달러 흥행기록을 내면서 도약했다. 1993년 웨인스타인 형제는 경영권을 보전하면서 디즈니에 미라맥스를 매각해 소니 픽처스, 폭스 서치라이트, 파라마운트 클래식 등 메이저 스튜디오의 예술영화 자회사 설립 바람에 불을 붙였다. 1994년 반격의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 미라맥스는 대중적 저예산영화를 제작하는 디멘션을 설립했고 이후 밥은 배급 실무와 디멘션의 경영에 집중하고 제작과 배급권 구매, 대외활동은 하비의 몫이 됐다. 미라맥스는 선댄스영화제에서 쇼핑한 영화를 본격적인 마케팅의 지원을 붙여 제대로 배급하는 한편, <펄프 픽션>(1994),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 <굿 윌 헌팅>(1997),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으로 칸과 오스카를 접수함으로써 미국 독립영화계의 지도를 고쳐 쓰고 또 인디영화의 배급을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로 뒤바꿔놓았다.

미국 인디영화에 미친 많은 긍정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미라맥스의 쇼맨 하비 웨인스타인의 애칭은 산타클로스나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다. 주류와 비주류를 막론하고 미국 영화인들이 그를 부르는 별명은 협박자, 폭군, 가위손 따위다(공교롭게도 웨인스타인의 제작 데뷔작은 가위 살인극 <버닝>이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2002년 연례 파워 101 기사의 캐리커처에서 22위에 오른 하비 웨인스타인을 반대자를 다 깔아뭉개는 헐크로, 밥은 조용히 헐크가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는 브루스 배너 박사로 그렸다. 사람들은 미라맥스가 영화는 고상하고 우아하지만 비즈니스는 난폭하고 공격적인 회사라고 말한다. 하비 웨인스타인은 다른 온화한 예술영화 제작자들과 달리 테스트 시사 뒤 재편집을 구체적이고도 강력하게 요구하고 약속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면 제작진이건 경쟁자건 협박하고 직원들의 보수도 야박하다. 1990년 이스마일 머천트는 <브리지 부부>의 배급을 두고 웨인스타인과 흥정하다 “차라리 내가 도로 영화를 사겠다!”고 일갈한 뒤 문을 하도 세게 닫는 통에 유리벽에 약간 금이 갔다는 전설이 있고, <아이리스> <디 아워스>의 프로듀서 스콧 루딘은 영원히 금연을 꿈꾸는 웨인스타인에게 담배 한 박스라는 알쏭달쏭한 선물을 하기도 했다. 물론 제프리 카첸버그나 마돈나처럼 웨인스타인과의 작업을 호평하는 ‘동족’도 있고 “스튜디오 뺀질이들처럼 등 뒤에서 칼 꽂진 않는다”고 호평하는 너그러운 인사들도 없지 않지만.

하비 웨인스타인 주요 필모그래피

<시카고>(2002)<갱스 오브 뉴욕>(2002)<다크니스>(2002)<스파이 키드2>(2002)<아이리스>(2001)<디 아더스>(2001)<제이 앤 사일런트 밥>(2001) <초콜렛>(2000)<말레나>(2000)<무서운 영화>(2000)

<사이더 하우스>(1999)<홀리 스모크>(1999)<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벨벳 골드마인>(1998)<재키 브라운>(1997)<굿 윌 헌팅>(1997)<잉글리쉬 페이션트>(1996)<스모크>(1995)<펄프 픽션>(1994)*출연작으로는 <포가튼 실버>(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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