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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맞는 서울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이혜경
박은영 2003-03-19

“장르 경계 파괴해야 문화변화 선도한다”

서울여성영화제가 올해로 다섯돌을 맞았다. 지난 1997년 격년제 행사로 조심스런 첫발을 내디딘 이 행사는 여성 관객의 폭발적인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지난해부터 연례행사로 방향을 틀었고, 아시아의 대표적인 여성영화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 비약적인 성장을 기적이나 요행으로 깎아세워선 안 된다. 이혜경 집행위원장이 모두가 ‘안 된다’라고 했을 때 ‘그렇구나’라고 수긍했더라면, 그렇게 접어버렸더라면, 오늘의 여성영화제는 있을 수 없었다. 여성영화제는 결코 순풍에 돛단듯 흘러오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풍랑도 암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혜경 위원장은 그 모든 것들과 맞장뜰 준비가 돼 있다.

영화제 진행 상황은 어떤가.

올해 예산은 10억원 정도다. 갈수록 커진다. 문화부에서 3억원, 서울시에서 1억5천만원 지원받고, 나머지는 기업협찬과 후원금, 티켓판매 대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아직 펀딩이 다 되진 않았다. 예상했던 것의 절반 정도? 이런 식의 문제는 항상 있어왔다. 적자가 나느냐, 무사히 치르느냐는 개막 2∼3주 전쯤 판가름나곤 한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올해 예산을 늘린 것은 영화제의 규모를 늘리는 것보다 프로그래머를 비롯한 스탭들이 이 행사를 좀더 오래 공들여 준비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그간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이제 잘하고 있는지 정리하고 확인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이것이 단기간에 끝나 없어지거나 불안정한 행사가 아니라는 자신감을 같이 확인하는 중이다. 행사의 외형적인 전환점이라면, 토론을 늘리고 관객과의 대화를 늘리는 시도일 것이다. 상영작의 60% 정도에 감독과 관객의 대화시간을 붙이려고 한다. 규모보다 내실을 기한다는 게 그런 뜻이다. 영화제에서만 가능한, 이런 서비스를 늘리려 한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기대하는 부문이 있다면

다 기대한다(웃음).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장르간 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는 의미의에서 ‘딥 포커스’를 기대한다. 여성문화가 21세기 문화변화를 주도하기 위해선 장르를 파괴하고 초월하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뉴커런츠는 미리 본 게 다 재미있었고, 도금봉 회고전이나 여성영상공동체, 필리핀 영화전도 기대하고 있다.

여성영화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다고 느끼나.

한마디로 무척 다양해졌다. 초기에는 여성의 삶과 존재를 증명하는 등 문제의식이 강조된 영화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 작품의 색깔이나 접근법이 다 다르긴 하지만. 지금은 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이고 섬세한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여성이 자기 삶을 조명하는 방식이 더욱 섬세하고 깊이가 있어졌달까.

그건 여성운동도 마찬가지다. 초기의 여성운동은 ‘차별’에 주목했다. 남자와 같아져야 한다는 믿음이 강했고, 관념적이고 구호적이었다. 지금은 여성의 차이와 다양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영화제가 그런 변화를 보여줘왔다고 생각한다. 성, 결혼, 육아 등 여성이 처한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해지고 있다는 것. 여성의 삶에 대한 성실한 성찰이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달리 표현되고 있다.

그간 위기도 있었다. 특히 2회가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옛날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나도 주책이다(웃음). 그땐 돈을 몰랐다. 2억원이 뭔지, 얼마나 되는 돈인지, 감이 없었다. 순전히 용기와 패기와 무지 덕에 출발할 수 있었던 거다. 나는 본래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하고 만다. 그런에 2억원을 만들기가 참 힘들더라. 입회비 늘리고 후원회원도 늘렸지만, 그 과정이 많이 힘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맞물린 2회 때는 팔이 마비될 정도였다. 기자회견 날짜는 닥쳤는데, 돈을 거의 구하지 못했다. 이런 얘기 해도 되나(웃음). 회견 전날 집행위원들이 우리 집에 달려와서, 회견 취소하자고 난리였다. 행사가 한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돈이 하나도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내 집을 팔아서라도 한다, 해야 한다고 버텼다. 여자들은 보통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일을 한다. 나도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예산을 위해서 뛰는 건 내 일이었고, ‘할 수 있다’는 게 당시 내 예측이었다.

그 이후로도 무사히, 성황리에 이어져 오고 있다. 비결이 뭘까.

여성영화제는 관객의 힘으로 가는 영화제다. 무대에서도 여러 번 “이 영화제를 관객 여러분께 바친다”고 말했는데, 그건 진심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관객이 열렬히 손을 잡아줬기 때문에 갈 수 있었고, 그 힘을 2회 때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영화제는 공동체적인 영화제다. 한번 왔던 관객이 계속 다시 찾아준다. 얼굴이 익은 관객이 많다. 그들에게선 좌절감과 활기와 희망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가 난다. 유유상종의 영화제인 것 같다.

서울여성영화제의 위상이 달라졌다. 어떻게 실감하고 있는지.

시대가 변하고 있지만, 모든 나라에서 다 가능한 일은 아니다. 대만에도 여성 지식인이나 문화인들이 많고, 여성영화의 역사도 깊은 편이다. 그런데 지금 그 곳의 여성 영화계는 그리 에너제틱하지 않다. 우리 여성 문화계가 지금처럼 진지하고 활기있고 발랄할 수 있는 것은 70∼80년대부터 이뤄진 어떤 집단적인 움직임, 정체성에 대한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 것 같다. 여성운동도 게으르지 않았고, 그 안에서 여성 영화인들도 적극적으로 제 몫을 해줬다. 서구 영화제를 다니면서도 우리가 한창 피어오르고 있다는 걸 느낀다. 해외 영화인들도 우리의 영화와 관객을 좋아하고, 우리의 에너지가 부럽다고 말한다.

예전 인터뷰에서 행사 연례화와 마켓을 장기적 목표로 들었다. 연례화는 이미 이뤄냈고, 남은 건 마켓 설립과 운영이다. 지금 어디까지 와 있나.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시아가 다 같이 가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하지만 시장의 기능을 추가하는 것이 이 영화제의 최대 목표는 아니다. 여성문화, 영상문화에 대해 사회가 유연하고 성숙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다양하고 다층적인 표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 미국과 유럽의 중심점을 넘어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지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 그게 우리의 장기적인 포부다.

이혜경 위원장에겐 직함이 많다. 여성민우회 문화기획실장과 여성단체연합 문화위원장을 거쳤고, 현재는 여성문화예술기획(이하 여문) 대표로 있다. 얼마 전부터는 문화행사단체인 메두사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여성’과 ‘문화’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단체와 그 활동을 훑어보면, 거기엔 어김없이 이혜경 위원장이 있다. 그는 얼마 전 여성운동상을 수상했다. 여성단체연합이 여성의 권익에 공헌했거나 전체 여성운동 발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으로, 이 위원장의 수상은 조금 때늦은 감이 있다. 정작 본인은 “혼자 받은 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쑥스러워하지만.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성장 환경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운동을 생각하진 않았다. 시대의 흐름이 그랬을 뿐이다. 물론 어려서부터 연극은 좋아했다. 지금 노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오락 시간, 학예회, 교회에서 사람들과 만나기만 하면 연극을 했다. 대본도 쓰고 만화 그려서 팔기도 했다. (웃음) 집에서도 음악을 많이 듣고 자랐다. 모이면 합창하고 토론하는, 그런 집안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활발하게 문화생활을 한 편이다. 여자라서 자유롭지 않구나, 하는 걸 처음 깨달은 게 중학교 때였다. 여행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럴 때마다 불쑥불쑥 남자들의 침범을 받았다. 위협감을 느꼈고 불편했다. 수동적이고 방어적이 되는 건 물론이었다. 다른 누구의 보호 아래 있지 않으면, 안전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진지하게 사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대학에 가서 연극과 사회과학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다. 연극반 선배들이 음악이나 연애에 몰두하는 등 주관적이고 도피적인 성향을 보였다면, 사회과학 서클 선배들은 냉철하긴 했지만 드라이해 보였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존 세계에 저항하고 있었다고 할까. 결국 나는 연극쪽으로 기울었고, 그 안에서 선언도 하고 나름대로 많은 변화를 시도했다. 남학생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남성중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성향에 놀랐고, 여성문화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작은 문화운동이 아니었다.

독일 유학을 다녀와서 여성민우회 문화 파트를 맡게 됐다. 독립단체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당시엔 여성운동이 자기 동력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적이고 진보적인 단체와 같이 호흡하고 성장해야 했다. 풍물, 노래, 연극 등 다양한 무료 공연을 기획하고 상연했는데, 어느 지점에서 이게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알았다. 그런 활동 자체가 여성 활동가라는 대상으로 한정돼 있었으니까. 같이 일하는 후배가 차비도 없이 지내는 걸 보면서, 여성운동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지원을 받아야 가능하겠다, 좀더 넓은 범위의 유료 관객을 상대해야만 우리 자위에 그치지 않겠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대학로에서 출발하게 된 거다.

연극에서 영화로 활동을 확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92년에 여문을 만들어 연극 <자기만의 방>을 기획하고 공연할 때 8개월 동안 매진 사례였고, 돈도 많이 벌었다. 여성들이여, 주체성을 가져라,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라, 하는 얘기가 그렇게 호응을 얻을 줄은 몰랐다. 한동안 여성들은 자기 성찰이 부족했고, 진보진영도 방황하고 표류했는데, 그런 문화적 공백기에 ‘주체성’이라는 시대의 화두를 건드려 치고 나올 수 있었던 거다. 다음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마찬가지였다. 진보성이라는 것이 여성의 일상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얼마나 허약하고 관념적인 것인지, 결혼제도가 얼마나 억압적인지, 그 좌절과 비참함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그 다음에 <아마존에서의 꿈>이라는 진보적 페미니즘 연극을 올렸는데, 3천만원 정도 적자가 났다. 그걸 계기로 여문을 사단법인으로 전환하고, 매체를 확장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일하면서 가족들의 박수를 받는 편인가. 활동적인 여성들은 그 반대의 경우가 많다.

가족의 도움 없이는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거다. 미안할 정도로 나 자신을 많이 합리화한 부분도 있다. 딸들과는 일상이나 영화나 연극 얘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심지어 딸들에게 귀엽다는 얘기도 듣는다. (웃음) 내가 하는 일이 그런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 것 같다. 젊은 세대에게 귀를 기울여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열려 있으려고 애쓰고, 대화도 자연스럽게 하려 하고. 처음부터 그러진 못했다. 첫애 낳고 직장생활 시작했을 때는 많이 힘들었다. 직장에선 집 생각에 발을 동동 굴렀고, 집에 오면 애한테 쩔쩔맸다. 그런데 동생 말이, 직장 다니는 엄마의 죄의식이 아이를 망친다는 거다.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의연해질 수 있었다. 남편도 그러더라. 퀴리 부인은 집에 우윳병하고 기저귀만 놓고 자기 일 보러 다녔다고. 그러니 너무 죄의식 느낄 필요없다고. 늘 좋기만 했던 건 아니지만, 남편도 많이 노력해준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여성문화운동의 갈 길은 끝이 없다. 지난 10년은 문화를 생산하는 데 급급했다면, 앞으로는 정책에 반영하고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해야 한다. 그렇게 할 일이 계속 보이니까, 계속 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젠 내 활동을 줄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서서히 줄여나갈 생각이다. 시대에 따라 일의 주역이 바뀌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앞으로 나는 연극을 할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다.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도 있다. 조용하게 깊이 건드리는 일을 하고 싶다. 그것만으로도 선택의 폭이 너무 넓다.

한 시간 반이 지난 시점. 끊임없이 울어대는 휴대폰은 더이상의 인터뷰를 불가능하게 했다. 미안한 얼굴로 자리를 정리하고 다음 약속 장소를 향해 떠나는 이혜경 위원장을 잡아 세우는 목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대표님! 가시면 안 돼욧!” 순식간에 사무국 곳곳에서 스탭들이 달려나와 결재서류를 들고 줄을 서기 시작했다(이건 과장이 아니다). 그런 이혜경 위원장을 보면서, 조만간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그의 계획이, 바로 이런 풍경 속에서 공중 분해되지 않을까 하는, 짓궂은 상상을 해봤다. 글 박은영 cinepark@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